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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학(育種學) 이라는 학문분야가 있다.
말하자면 재배식물이나 수목, 또는 사육동물등 생물의 품종을 개량하여 보다 사용가치가 높은 신종, 신품종을 육성하는 연구분야다. 한편, 종자가 생기지 않는 과일을 [씨없는 과실] 로 분류하는데 온주밀감, 네이블오렌지. 바나나, 무화과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인위적(人爲的) 으로 작출(作出) 한것, 그러니까 육종으로 개량한 것으로는 수박과 포도의 델라웨이 등이 그것이다. 처음, 씨없는 수박이 출시 되었을때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먹어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고 이 위업을 달성한 분이 [농업연구소 소장] 이었던 우장춘(禹長春) 박사였다. 그분은 육종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 였고 정부로 부터 문화포장까지 받은 분이다. 우장춘 박사(1898- 1959)는, 일본 동경에서 출생했으며 1919년 동경대학 농업과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농업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 농업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으며 [채소종자의 육종합성] 에 성공하는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표면적 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인간 우장춘의 비극적인 뒤안길을 살펴 보려면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의 시해사건 (弑害事件) 에서 출발해야 한다. 조선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 1919) 의 황후인 민비는, 민치록의 딸로 9세에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몹씨 가난하게 살았다. 그때 고종의 생부 이기도한 흥선대원군 의 부인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 책봉 되었으나 대원군 과는 대립, 민씨 처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진다. 그러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족은 실각하게 되고 1894년 대원군의 재 등장으로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청국에 기대고 있던 민비는 러시아에 접근하게 되었고 청일전쟁 승리후 조선에서의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 으로서는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국에 대해 저지른 가장 야만적이고 악랄한 행위로서 일본 육군종장 출신의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 를 주한공사로 보내면서 '여우사냥' 이란 암호가 붙은 군사작전을 수행케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민간인 건달(浪人) 들이 저지른 일로 돼 있지만 실상은 현역군인이 지휘하고 경찰이 동원된 군사작전 이었다. 1896년 10월 8일. 미우라의 지휘로 50여명의 군인, 경찰, 신문사 사장, 낭인들이 동원되어 건청궁(乾淸宮)에서 민비를 난자시해(亂刺弑害) 한후 궁밖에서 그 시신을 소각하기까지 했다. 민비는 그후 폐위되어 서민(庶民) 이 되었다가 1897년 (광무1년) 명성(明成) 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이 거행되어 청량리밖 홍능(洪陵) 에 장사 되었다. 파란만장한 생애(44세) 가 그렇게 끝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라고 한다. 열강이 각축하는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이 치욕적인 사건에 한국인이 가담하고 있었 는데 그 이름이 우범선(禹範善) 이다. 당시 그의 공식직함은 조선군 훈련대의 제2대대장 이었고 계급은 참령(參領 -지금의 소령) 이었다. 우범선은 사건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도꾜와 고베를 거쳐 일본 최대의 조선기지(造船基地) 인 구레시(吳市) 에 정착하게 되는게 이 과정에서 일본여인과 결혼, 다섯살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은 민비의 사람인 고영근(高永根) 에 의해 암살된다. 우범선이 암살된 구레시의 와쇼거리 2079번지는 지금도 흉가(凶家) 터가 되어 집을 짓지않는 빈터-밭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1950년 3월 8일.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땅에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2남4녀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남겨둔채 우장춘은 홀홀단신 가난에 쪼들린 조국으로 돌아온다. 아내와 장성한 자녀들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남기지 않으채 농업환경이 열악한 아버지의 나라도 돌아 가기 위해 밀항자들을 수용하는 오무라수용소(大村收容所) 에 걸어 들어갔다. 우장춘은, 바로 그 우범선의 아들이다. 언론인 최석채의 증언은, [우장춘 박사가 내게 직접 말했다. 아버님을 대신하여 조국에 속죄하기 위해 가족을 버렸노라고....] 근자 [베이징] 에서 소위 [6자회담] 이라는게 열리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당사자들을 둘러리로 앉혀놓고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이 마주앉아 각자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협상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 일어났던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똑같은 환경을 다시 만났다는 것은 우리가 변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했다는 증거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민족역량(民族力量) 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반도가 가지는 지정학적 위치의 질고(疾苦) 로만 치부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은 [종자] 를 남기지 못하는 [씨없는 수박] 이 될수도 있다. 변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속내를 갖추지 못한채 깃털처럼 가볍게 겉멋으로만 산다면 그 길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역사가 무서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