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글올리기. b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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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Aege) 해(海)는, 지중해의 북동부, 그리스 동부와 터키서부 사이에 있는 해역으로서 남북이 약 650킬로, 동서가 약 300킬로이며 가장 깊은곳이 3294미터에 이른다. 이 해역에는 크고작은 섬이 많아 일명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일찍부터 에게문명이 발당했으며 터키령의 연안(소아시아) 에는 식민지가 많고 섬과 연안에는 유적지도 많기 때문에 관광지 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각기 다른크기의 배를 타고 에게해를 여러번 항해한 일이있다. 에게해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그 특유의 바닷물 색깔이다. 정말 불루불랙잉크색 그대로다. 에게해는 그렇게 검푸른 바다다.
한번은, 터키선적의 50톤급 여객선으로 ‘쿠사다시’ 를 떠나 에게해를 항해하게 됐는데 날씨는 청명했지만 한 바다에 나가니 너울파도가 일고있었다. 거개의 사람들은 높은파도에 멀미가 나는줄 알지만 제일 무서운건 너울파도다. 파도의 폭이 넓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너울파도에 견디는 장사는 없다. 결국 50여명의 승객은 물론, 나중에는 선원들과 선장까지도 멀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멀쩡한건 나 하나뿐이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 할때까지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터키인 선장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인가.’ 나는 대답을 짧게했다. ‘나는 터키가 사랑하는 한국인이고, 우리나라는 반도로서 삼면이 바다다.’ 터키인 선장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엄지를 세워보이면서 나를 ‘스트롱 맨 ’ 이라고 했다.
나는 거의평생 바다낚시를 했다. 꼭 두 번, 죽을고비가 있었는데, 한번은 남해에서 배낚시를 하던중 작은배의 낡아빠진 육상엔진(법으로는 배에 장착하지 못하게 돼있다.)이 고장나서 서 버린것이다. 우리일행 4명과 선장까지 5명이 탄 이 작은배는 조류에 밀려 떠 내려가기 시작 했고 급기야 날이 어두워져 동서남북을 알수없는 상황이 됐다. 내가 선장에게 물어봤다. ‘이대로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것인가.’ ‘대마도쪽으로 갑니다.’ ‘만약 대마도 해역에 닿지못하면 그대로 태평양으로 가는게 아닌가.’ 선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미상불 일은 커졌고, 달리 손쓸 방법도 없었다. 바다귀신이 되는 차례만 남은것이다. 그때, 멀리서 불빛이 보였고, 그게 점점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작은어촌, 저녁이면 돌아오지않은 배를 곧 알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이 수색에 나선것이다. 그런일이 자주 있었다는 얘기다. 수색나온 배에 예인되어 어촌으로 돌아가는중 달빛에 번쩍이는 물체가 계속 배 옆을 따라왔다. 갈치였다. 어촌에 도착할때까지 나는 채낚기로 굵은 갈치 수십마리를 잡았다. 낚시꾼이 그렇다.
또한번은 서해의 덕적도 앞 바다에서, 작은 목선의 낡아빠진 엔진이 서 버렸고 배는 파도에 밀려 무인도의 바위로된 절벽쪽으로 가고 있었다. 부딪치면 낡은목선은 산산조각이 나는것이고 그 다음일은 얘기할것도 없다. 겨울바다의 칠흙같은 밤에 배는 절벽으로 다가가고 선장은 죽을힘을 다해 엔진을 살려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우리일행 5명은 손에 들수있는 막대는 전부동원해 배와 절벽사이의 간격을 유지 하기위해 사력을 다해 절벽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때 개업의(開業醫)이신 최원장께서 선장에게 말했다. ‘혹시 엔진에 에어가 차 있을수 있으니 먼저 에어를 빼고 다시 시동을 걸어보라.’ 정말 그대로 였다. 엔진이 살아났고, 우리도 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 낡아빠진 목선(어선)을 그후 10년동안 탔으니 알다모를일이 그것이다. 단, 선장이 바다밑 여(바위)를 잘 아는게 제일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만큼 고기를 많이 잡을수 있는것이다. 또하나 알다 모를일은 어려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 선장이 뭍에 올라와 자동차만 타면 멀미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오랜시간 여러곳에서 여러 가지 배를 타다보니 배의 속성을 알게됐고, 바다와 배, 배와 사람의 관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질수 있었다. 그리고 배를 사랑하게 된것도 사실이다. 배는, 그것이 수십만톤의 거대한 철선이라 해도 모든 나라에서 여성(女性)으로 분류 된다. 그 거친 바다를 헤쳐가는 용감무쌍한 배가 여성으로 분류되는것은, 우선, 그 몸체가 유연한 곡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배들은 곡선에 따라 성능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다음은, 여자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듯, 배도 페인팅이라는 화장을 한다. 여자도, 배도 나이가 들면 더 짙은 화장을 하게된다. 그리고 배는, 좀처럼 하반신을 들어내지 않는다. 배가 하반신을 들어내는것은 사고나 수리할 때 뿐이다. 배와 여자는 똑같이 유지비가 많이든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쓸어주고, 닦아주고, 기름치고, 조이고, 덧칠을 해야하는 존재다. 지금은 작은 변화들이 있긴하지만, 배는 전통적으로 남자만 타는게 사실이다. 그러니 배는 여자인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정설도 아니고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것도 아니지만 오래동안 배를 타다보면 알게되는 속설임도 사실이다. 나중에, 선장은 배가 움직이는동안 급한 볼일이 있으면 내게 키를 맡기곤했다. 배를 오래타다보니 반은 뱃사람이 됐다는 얘기다.
배가 가지는 기능중 가장 중요한것은 무엇일까. 브릿지에서 통신실을 거쳐 갑판까지, 그리고 바닥의 기관실까지 중요하지 않은 기능은 없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가장 기초적인 기능은 ‘복원력-復元力“이다. 다른 어떤힘에 의해 기울어졌던 배가 그대로 침몰하지 않고 일어서는 것은 전적으로 이 복원력 때문이다. 복원력을 잃으면 다른기능들은 아무 쓸모도 없다. 그렇게 배의 복원력은 중요하다. 생사가 걸린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배의 복원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무게중심에서 나온다. 무게중심이 부력을 받아야 기울어졌던 배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있었던 연안여객선들의 각종 사고는 과적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온갖 하중이 갑판에만 쌓이고 배 바닥에 무게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복원력이 없어 뒤집힌 것이다. 대양을 항해하는 소형요트의 경우. 요트중심의 keel 을 뚫어 center-board를 길게 물속으로 늘어뜨리기 때문에 비록 작은 요트지만 그 확실한 무게중심 때문에 뒤집히지 않는것이다. 때문에 무게중심은 배에 있어서는 가장 우선되는 조건인 셈이다. 바닥에 깔리는 무게중심없이는 복원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봐서 아무리 화려하고 큰 배라해도 그 무게중심이 바닥이 아니라 갑판에 몰려있을때 작은파도에도 뒤집히는게 그런 이치다.
조금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모든 지상의 구축물은 그 보이는 부분을 떠 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부분의 기초 때문에 서 있는것이다. 기초가 부실하면 그 위에지은 구조물은 금이가고, 기울고, 종당에는 무너진다. 배의 무게중심도, 구조물의 기초도, 보이지 않는곳에 있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의 국가, 사회공동체를 배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호’ 가 그것이다. 지금 한국호는 누가봐도 호화스러운 선박이다. 잘차려입고, 좋은것 먹고, 좋은집에서 살고있다. 청바지 하나에 500만원짜리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있으며, 그래서 하나같이 갑판에만 모여있다. 심지어 민주한국호의 엔진이라고 할수있는 국회까지도 배밑을 떠나 갑판에 올라와 온갖 추태를 연출하고 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배의 바닥에는 내려가지 않으려 한다. 사실 그건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누가 어둡고 냄새나는 배 바닥에 있으려고 하겠는가. 배가 뒤집혀 모두가 죽는다 해도 거기에 내려갈 자원자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기피하는 일을 자원해서 할것인가. 그게 종교다. 종교에게 주어진 사명이 바로 ‘무게중심’ 이다. 그 종교가 지금 역세속화되어 갑판으로 올라갔으며 세상을 따라 물량화되고있다. 그것이 변질이며 타락이다. 배가 그 생명선인 복원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게중심’ 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기피하는 그 무게중심을 자청해서 감당하는게 종교요, 기독교다. 교회는 그래서 바닥에 있어야 한다. 그게 정 위치다. 하나의 국가, 사회공동체를 떠 받치고 있는 기초가 돼야 하는것이다. 일찍이 바울사도는 그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것은 잠시뿐 이지만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4:18 공동.) 기독교는 잠시 보이다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것을 추구하는게 그 본령이다.
이미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주어졌는데도 왜 지금의 교회는 갑판에 자리잡고 온갖 보이는것들을 탐욕적으로 추구하고 있는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변질됐기 때문이다. 기복-祈福 이 그것이다. 보이는것을 추구하는한, 교회는 바닥으로 내려갈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인간집단이 될 뿐이다. 거기에 구원은 없다. 가장낮은 자리, 더 내려갈수 없는 바닥. 그러나 복원력을 일으키는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길’ 이다.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원리가 그것이다. 오뚜기는 쓰러지지도 않고, 쓰러뜨릴수도 없다. 그 무게중심이 항상, 분명하게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호의 바닥은 비어있다. 작은 파도에도 뒤집힐수 있는 취약점을 안고있는 것이다. 그 바닥의 무게중심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것을 추구하는 교회의 몫이다. 그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다. 그래서, 영광의 부활이 있기전에 고통의 십자가가 있었음을 잊으면 안된다. |
인간은 동물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정신적인 존재’ 다. 그리고 영적(靈的)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 철학의 문을 열었다면 인간의 영은 종교의 문을 열었다. 철학의 밭을 통과한 신앙은 건전하지만 그렇지 못한 믿음이 미신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위대한 인간의 정신에 우,열이 있다는 것은 사실 신비에 속하는 문제다. 그것은 선과 악을 설명할수 없는것과 같은 차원의 숙제이기도 하다. 어떤 정신은 인류에게 봉사했지만, 다른정신은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인간정신의 우,열은 아마도 처음부터 갈라져 있었을 것이다. 어떤면에선, 그건 태생적일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변하지 않는것을 보면 이해할수 있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나쁜피’ 라는 매우 유비적인 표현을 쓴다. ‘병든정신’ 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람이 살고있는 모든시대에는 그 시대에서 나타나는 ‘시대정신’ 이 있어왔다. 그 시대정신 안에는 사유체계(思惟體系)는 물론, 가치관도 포함돼 있으며 그 시대정신이 사람들의 행동양식(行動樣式)을 결정짓는것도 사실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이미있는 학습과정의 ‘틀’ 을 통해 그것이 교육되고, 퍼지기 때문에 보수적인 측면이 보전되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인터넷 이라는 보편화된 수단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검색된 정보를 정제하고, 구분하고, 판별하는데는 그렇게 할수있는 ‘실력’ 이 그 바탕에 있어야 한다. 그게 있으면 정보의 주인이되고, 그게 없으면 정보의 노예가 될수밖에 없다. 정보화시대의 위험과 파탄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것들을 아프게 체험한바 있으며 지금도 똑같은 위험앞에 노출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한 네티즌이 대학교 커뮤니티에 올린글이 ‘43계명’ 이란 명칭으로 불리면서 인터넷포털의 게시판, 카페, 블로그등을 통해 빠른속도로 넓게 퍼지고 있다. 그 네티즌이 커뮤니티에 올릴때의 글 제목은 ‘사회에 나가면 누구나 알게되는 사실43가지’ 였다. 43개의 짧고도 자극적인 글들은 대단히 냉소적이고 자조적(自嘲的)이며, 어떤 글들은 허무주의-nihilism 에 가깝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 보는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이제 43개의 글중 그 내용이 상대적으로 더 첨예한 10개를 선정, 부연설명 해 봄으로서 ‘병든정신’ 이 사회공동체에 끼치는 나쁜영향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나쁜정신도 시대정신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1.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 는 얘기다. 함께 구정물에 손을 담글 의사가 없는, 가장 소극적인 이기주의가 그것이다. 인간의 사회공동체는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 에 의한 ‘관계’에서 시작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한 발 물러서 있겠다는 태도는 지극히 반사회적인 발상일수 밖에 없다. ‘너희끼리 잘 해봐’ 아웃사이더 만이 내 뱉을수 있는 말이다. 이런부류가 많아지면 그 사회공동체가 붕괴되는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2.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
헌신짝은 소용에 닿지않는 버려진 물건이다. 헌신(獻身) 이라는 이타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쓰레기’ 가 된다는 이 발상은 지극히 반 인간적이다. 인류문화사에서 인간집단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향상시킨것은 살아있는 정신들의 그 고귀한 헌신과 자기희생, 그리고 봉사였다. 가장 고상한 인간의 이타적 행동에 대한 이런 냉소는 그 정신이 깊이 병 들었다는 증거다. 가장 근접한 사례가 있다면 부부사이까지 희생하면서 자녀교육에 매달리는 부모들이 자식이 성장한후 용도폐기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져 헌신짝이 되는것이다.
3. 포기하면 편하다.
패배주의의 전형이다. 모험과 도전이 없는 삶은 그 겉모습이 어떠하든 젊은이의 길은 아니다. ‘야심’ 은 성공의 가장 큰 열쇠다. 야심이 있어야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를 향해 어려운 과정들을 극복해 나갈수 있다. 지금의 젊은세대가 어려움에 약한것은 무지한 부모들의 과보호가 온실이 되어 비바람을 견디는 인내력을 길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빨리 포기한다.
4. 가는말이 고우면 사람을 얕본다.
대단히 체험적인 말같다. 큰목소리가 통하는, 왜곡된 세상을 살아본 사람의 경험이 그것이다. 인사-人事 는 말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사회는 만인이 만인을 향해 쟁투하는 살벌한 사회다. 자칫 공손한 언사가 약자로 비칠수도 있는 분위기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잘못된 것임을 계속 천명하면서 고운말이 오가는 사회를 만드는것이 당연한 일이지 얕보이는게 싫어 목소리를 높인다면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있는 사회는 만들지 못한다. 고운말에 힘을 싣는것은 그래서 ‘자기의 신념’ 이다. 자기철학이 분명하다면 이미 표정에서 말 이상의 효과를 얻을수 있다.
5. 즐길수 없으면 피하라.
즐겁다는 개념은 괴롭다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정서다. 사람사는 세상은 날씨와 같다. 맑고 따뜻한 날이 있는가 하면, 먹구름이 낄때도 있고, 비바람이 치는가 하면 추운날도 있다. 그런데 맑고 따뜻한 날에만 얼굴을 내밀고, 궂은 날씨에는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험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정신적존재인 인간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통해 더 크게 성장하는 ‘인격체’ 임을 알아야 한다.
6.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하다.
일본과 우리는 ‘같은시간대’ 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보다 평균 한시간 먼저 해가뜬다. 같은 시간대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한시간을 벌고 들어가는 것이다. 하루를 일찍 시작 하는것은 밤시간과는 무관한 ‘현실적인 이익’ 이 있다. 시간대가 같기 때문에 먼저 시작하는쪽이 유리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우리들보다 더 피곤해야 하는것일까.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7. 어려운 길은 길이 아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생각의 연장이다. 세상에는 어려운 길이 따로있고, 쉬운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 두가지 길은 섞여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어려운 길을 피하면 앞으로 나아갈수가 없다. 그 자리에 정체된다는 것은, 고여있는 물이 썪는것과 같은 과정을 밟게된다.
8. 내일 할수있는 일을 오늘 할 필요가 없다.
‘준비’ 가 필요없다는 괴변이다. 오늘일을 다 하고도 여력만 있다면 내일일을 끌어다 하는게 발전이요 성공이다. ‘주어진일’만 하는것은 노예일 뿐이다. 노예는 절대 내일일을 미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자유하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그게 자기일 이라면 모레일까지도 끌어다 해야한다. 정당하게 벌어 크게 재산을 불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게 사과장사라 해도 열심히 자기일을 해 온 사람들이다.
9. 고생 끝에 골병난다.
고생의 의미는, 성공이 주는 보상이다. 골병날까봐 두려워서 ‘리스크’ 를 피한다면 평생을 살아도 성공할수 없다. 성공은 꼭 돈을 많이버는것 만은 아니다. 자기의 실현, 자기재능의 구현, 그것들이 사실은 더 값진 성공이다. 골병은 고생하는 방법과 자세가 나빠서 생긴것이지 고생자체가 골병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10.티끌 모아봐야 티끌이다.
일확천금은 언제나 재앙을 불러온다. 복권인생을 두려워 해야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땀흘려 번 돈의 가치는 다른 어떤것과도 비교할수 없다. ‘저축’ 은 변함없는 경제의 미덕이다. 아무리 많은숫자도 그 시작은 ‘하나’ 부터다. 하나를 우습게 알면 돈은 쌓이지 않는다. 티끌 모아봐야 티끌이라는 이 잘못된 생각은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 악마의 속삭임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사회공동체 안에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부류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가 붕괴되지 않고 굴러가는것은 ‘건전한 정신’ 이 상대적으로 더 많기 때문이다. 건전한 정신의 참 기능은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反을 성찰의 계기로 삼아 合을 도출해 내는 능력이다. ‘헤겔’ 에 의해 정식화된 ‘正反合’ 의 변증법적 논리가 바로 그 개념이다. 문제는 合을 이끌어 내는 우리사회의 수준이 크게 미흡하다는 사실을 인정 해야한다. 지금의 모든 사회적 혼란의 원인도 바로 거기에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하다’ 가 아니라, ‘일찍 일어나는 새라야 벌레를 잡을수 있다’ 가 변함없는 정답이다. 그래서 긍정과 부정은 종이한장 차이인 것이다. |
2007년, 동국대학교는 파벌싸움등 부작용이 크게 노출된 총장의 교수직선제를 폐지 하고 대신 재단이사회가 오영교 현 총장을 영입했다. 새 총장의 지론(持論)은, ‘대학은 시장(사회)의 수요에 맞춰 고객(기업)의 요구대로 질 좋은 제품(졸업생)을 공급해야 한다‘ 는 것이다. 오총장은 2008년 2월 1049명 교수전원의 강의평가를 공개, 대학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2009년7월현재, 동국대학교는 4년제 종합대학교로서는 처음으로 ‘학교의 일대개혁, 조정작업’ 을 진행중이다. 특히 ‘상시정원관리 시스템’은 학과의 통폐합은 물론, 교수들의 전공까지 바꾸는 혁신적인 내용으로서 앞으로 많은대학에 상당한 충격과 자극을 줄것이 틀림없다.
예들들어, 기계공학부가 기계로봇에너지 학부로 명칭을 바꾸는것은 물론, 교육커리큘럼의 60%를 바꾸는 작업을 하고있다. 이는 기계공학 전체라는 넓이보다는 특정부분에 집중, 전문성을 높여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의도다. 뿐만 아니라, 식물생명공학부 교수 일부는 바이오환경과학부로, 다른일부는 기초생명과학부로 분리되기도 했다. 동국대의 전체 53개 학과와 전공중 16개 분야에서 이런식의 통합, 분리, 개편이 추진되고 있다. 대학측(재단)이 매년 각 학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하위15%학과의 정원은 줄이고 대신 우수학과의 정원을 늘려주는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정원을 빼앗긴 학과,교수들이 학생들의 선책을 받기위해 스스로 개혁, 개편에 나설 수밖에 없게된 것이다. 대학안에서 분야별 경쟁이 시작된 것으로 평가할수 있는 혁명적 변화가 아닐수 없다.
2009년 10월 현재, 이 좁은땅과 5천만이 채 안되는 인구에 4년제 대학만 206개다. 엄청난 역피라밋의 기현상이 아닐수 없다. 여기에 2년제 전문대학까지 합치면 400개가 넘는 고등교육기관이 있는셈이다. 년간 배출되는 졸업생이 50여만명, 일자리는 그 반밖에 수용할수 없는 경제, 산업규모다. 우리사회에서 백수가 누적되는 현상은 이러한 수요와 공급이 맞지않는 구조때문 이기에 이대로 가면 ‘일자리’ 는 해결될수 없는문제로 남는다. 이미 정부-교육부는 86개 대학을 통,폐합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아직까지 미미할 뿐이다. 지금과같은 대학숫자와 산업규모로는 ‘취업-일자리-실업’ 의 문제는 전혀 해결될수 없는, 맞물려있는 구조적 악순환만 되풀이 된다.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안목으로 이일에 접근하지 못하고있다. 역대정부의 땜질이 그것이며 대입제도가 열다섯번 바뀐게 그 증거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촌자체의 변화속도는 이제 놀라운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대학들은 70,80년대에 만든 ‘학과들’ 이 같은 간판을 달고 20년, 30년된 골동품 노트로 강의하는 형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교육의 소비자인 학생-학부모-사회가 요구하는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교육의 공급자인 학교-교수들이 오래전에 배웠던 학문을 그대로 가르치는 공급자 위주의 교육인것이다. 4년제 대학교 거의 모두가 비슷한 학과로 백화점같은 구색을 맞추어 가지고 있으며 교육의 질적 내용보다는 학교의 몸집불리기에 더 치중해온게 사실이다. 대학진학율은 84%로 세게최고지만, 교육품질과 수요자의 만족도 조사에서는 조사대상 60개국중 59위로 최하위권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2008년 통계) 공급은 넘쳐나지만 수요자가 골라쓸수 있는 고품질의 상품은 없다는 얘기다. 교육의 외화내빈(外華內貧) 인 것이다.
1896년 박승직 이라는 상인이 ‘박승직 상점’ 을 개점했으며, 지금 이 가게는 ‘두산’ 이라는 그룹이되어 전세계 33개국에 사업체를 가지고있으며 35,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2008년, 두산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를 인수했다. 재단이사장은 두산중공업회장인 박용성씨다. 기자와의 인터뷰중 그가 한 말의 중심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면, 중앙대의 19개 단과대학, 77개학과를 싹 잊어버리고 백지위에 완전히 새로그릴 계획이다. 내년 서울캠퍼스 신입생부터 여기에 맞춰뽑겠다. 이어서 그는, 국내대학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이 될것이라며, 그동안 대학들의 학과구조 조정은 음식점으로 치면 ‘신장개업식’ 이었다. 명칭만 근사하게 바꾸고 옛날것 그대로 가르쳐왔다. 우리는 완전폐업하고 새로 개업하는 방식으로 할것이다.
자동차 시대에 대학은 여전히 ‘마차’를 가르치고 있다. 대학들이 엄청난 등록금을 받으면서 졸업생이 사회에 나가 제밥벌이도 못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것이다. 그는, 대학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교수평가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지만 ‘그것 못하면 학교못한다’ 고 설득, 지난 1년사이 최대 5000만원까지 차이나는 교수연봉제가 도입됐다. 이제는 교수들도, ‘내가 연구 안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이 대학에서 못견디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시작 했으며, 이는 도서관 새로 짓는것보다 더 큰 변화라고 했다. 그는 총장직선제에 대해서도 ‘그건 정말 법으로라도 못하게 해야한다. 환자가 병원장뽑고, 공무원이 장관 임명하는가. 직선제 없애고 잘하는 총장은 수십년동안 소신껏 하게해야 한다. 대학처럼 설득할 대상많고, 시간많이 걸리는데서 임기4년 으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2010학년도 수시모집원서가 마감된 가운데 중앙대학교는 서울지역 주요대학중 문과, 이과, 예체능계열의 학과별 최고경쟁율을 모두차지했다. 지난해보다 2만2천여명이 더 많은 6만3천여명의 지원자가 몰렸으며 올해 수시모집 정원 2533명은 34,4대 1의 기록을 세웠다. 대기업의 투자와 개혁에 대해 기대감이 컸다는 반증이다. 지금까지 대학재단들은 거개가 ‘학원모리배’로서 재단이 학교를 지원한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돈을 빼가는 기생적인 관계였다. 여기에 지방정치모리배가 가세, 이 좁은땅에 400개가 넘는 이름만의 대학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생각하면 무모하고 비참한 일이 아닐수 없다. 지금의 우리대학들이 세계적 경쟁력이 없는것은 대학캠퍼스가 철밥통의 무풍지대 였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서 대학가에도 경쟁과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것은 크게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 대학들의 속사정은 밖에서 보는것 보다 더 심각하다. 교육부가 예측한 자료를 보면 지금기준으로 대입정원을 60만으로 볼때, 2012년까지는 고교졸업자가 64만명을 유지하지만 2015년부터 줄기시작해 2021년에는 47만명이 된다. 출산율 감소가 나타내는 결과다. 2008학년도를 기준할 때, 입시에서 정원 30% 이상을 채우지못한 대학이 27개교다. 지난23일, 경북경산에 있는 4년제의 아시아대학이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대학이 통째로 매물로 나온것이다. 감정가 110억원 이었지만 1차 경매에서 유찰, 77억5000만원으로 다시 경매에 부쳐질 계획이다. 앞으로 이런일은 계속 생길것이다. 이미 교육부는 경영이 어려운 22개 사립대에 대해 실사를 실시하고 있다. ‘변신하는 학교만’ 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그래서 엄연한 현실이다.
충남 당진에 있는 신성대학은, 2007년 ‘제철산업과’ 를 새로 만들었다. 인근에 있는 현대제철과 제휴를 맺고 만든 학과다. 정원80명의 이 학과는 취업과 함께 현장에서 전문기술과 기능을 사용할수 있도록 커리큘럼부터 현재제철이 직접 참여했다. 강의도 현대제철 직원이 직접하고 있으며 졸업생은 전원 현대제철에 취업한다. 충남 보령에는, ‘아주자동차대학교’ 가 있다. 본래는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등을 갖춘 전문대였다. 2005년 학교이름을 바꾸면서 학과도 자동차 디자인에서부터 부품개발, 장비운영, 자동차튜닝등을 연결, 자동차 생산라인처럼 바꿨다. 600미터의 자동차주행연습장엔 수백대의 차가 있으며 신입생 4-5명당 한 대의 실습용 자동차를 주고 직접 분해해보고 조립하게 한다. 전체교수 29명중 산업체 경력자가 26명, 미국의 GM출신을 비롯, 현대자동차연구실, 기아의 중앙기술연구소, 대우중공업, 삼성전자, 만도기계등의 전문가들이다. 이 학교의 2008년도 졸업생 취업률은 89%. 웬만한 수도권대학보다 높은 비율이다. 한가지 분야에 집중하는 교육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경남의 거창, 이 시골에서 2010년 3월에 ‘거창승강기대학’ 이 개교한다. 이 대학은 승강기전문학과로만 운영될 계획이다. 우리나라의 승강기 설치 증가율은 세계3위권 이지만 승강기제조, 유지보수, 검사 기관등에서 요구하는 맞춤형 전문가는 태부족이다. 이달초 마감한 수시모집결과 평균 4.6대 1. 학과에 따라서는 8.4대 1의 높은경쟁율을 보이고있다. 지원자중 상당수가 내신1.2등급이며 수도권지역 지원자가 25%였다. 2012년까지 이 지역에는 승강기부품과 완제품을 생산하는 60여개의 관련업체가 들어서며 ‘승강기빌리지’가 되는것도 호재였지만, ‘졸업후 취업이안되면 수업료를 100% 환불하겠다’ 는 약속이 어필한 때문 이기도 하다. 학교가 학생을 선발하는 방법과 교육의지, 그 전문성에서 전에는 전혀 볼수없었던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고 있는것이다.
지원자감소, 졸업생의 미취업누적(백수의 증가) 대학운영에서 받게되는 재정적 압박, 정부의 구조조정등 대한민국 대학들의 앞날은 암울하기만 하다. 시골의 초등학교 페교가 늘어나듯 대학들도 문을 닫아야 하는 사태는 이미 분명히 보이는 현실이다. 수요에 맞는 교육이 아니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빠르게 변신하는 대학, 오직 육영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재벌이 인수하는 대학, 한가지 분야에 집중,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는 대학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킬빌 1,2’ 는, 오락영화 로서는 특이하게 만들어진 아주 재미있고 유쾌하게 볼수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만든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Quentim Tarantino)는,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빌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북미 남동부 애팔레치산맥 남부에 거주, 인디언중 유일하게 음절문자를 가지고 있던 체로키(Chrokee) 의 피가 섞여있는 인물이다. 그는 감독이지만 배우들 이상의 인기를 가지고 있다. 얼마전 한 언롤사 기자와의 인터뷰가 있었던바. 그중 한 대목을 보면, -당신은 영화공부를 따로 한적이 없다는것 때문에 불리한적은 없었는가. -그런적은 없다. 그게 바로 할리우드의 재미있는점 이기도 한데, 이곳은 골드러시때와 비슷해서 누가나 어디서나 올수있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만 하면된다. 어떤학위도 그 사람의 능력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당신의 결과로만 당신을 말할수 있다.
학력(學歷) 이 아니라 실력(實力) 만이 통한다는 얘기다. 우리가 실력이 아니라 ‘학벌’ 을 따지는 동안, 400개가 넘는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84%의 진학률이 거대한 백수군(白手郡)을 만든것이다. 이제 간판이 통하던 시대는 분명히 끝나가고 있고 또 끝내야한다. ‘실력을 입증 하는자’ 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게 어떤분야든 ‘최고의 전문가’ 만 되면 성공은 보장된다. 돈은 그 뒤를 따라오게 돼 있다. 정확히 대학졸업생의 절반이 백수가 되는 구조적현실을 똑바로 보고 자기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진정, 학부모들의 책임도 거기에 있다. ‘좋아하고 잘 하는것’ 그걸 잡고 나아가면 확실하게 성공한다. 그게 없는사람은 하나도 없다. 발견되지 못하고, 계발되지 못한채 사장되는 경우만 있을뿐이다. |
얼마전. 사회학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토론모임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고유한 전통에서 크게벗어난 현대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위기’ 의 핵심적인 내용을 도출해 보려는 시도로서의 학구적 탐구를 위한것이었다. 오랜시간 저마다 발제와 설명, 그리고 진지한 토론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론의 학문적 도출에 실패한 것이다. 비로서 참가자들은 우리가 가지고있는 ‘위기’ 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고 넓다는것을 실감했고, 그것이 어떤 간단한 도식으로 함축할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성과가 있었다면, 지금 우리사회의 위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틀’ 로는 정의할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위험한 수준에 육박해 있다는 발견이었다. 학자들이 이렇다면 보통사람들이야 더 말할것도 없겠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성찰할수 있고 내일을 예측해 낼수있다. 어제와 오늘을 반드시 비교해야 하는 당위는 사실 절대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공동체는 현재만 있을뿐 과거가 희박하고 내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학자들이 모여 ‘위기’ 의 내용을 도출해 내지 못한것은 지금의 위기가 과거와 미래에 대해 연계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중요한것은 오늘과 내일 때문이다. 오늘만 있는 사회는 성숙해 질수가 없다. 어제라는 ‘바탕’ 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공동체가 정상적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제를 알아야 하고 그 바탕에서 내일에 대한 예측을 바르게 할수있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오늘만 살것처럼 뛰어다니고 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모르는채 빨리빨리 살고있다. 그래서 위기는 더 커지는 것이며 그것이 파악도 안된채 점점 우리의 생활을 벼랑 으로 몰아가고 있는것이다.
사람이 다른사람을 향해 ‘안녕하세요?’ 하면 그게 인사다. 인사는 人事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사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인간관계’ 다. 결국 모든 사회공동체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로 형성되는 조직이기에 그렇다. 더 부연해 설명하자면, 사회는, 사람이 다른사람을 ‘배려’ 하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인간조직이다. 배려하고, 배려받는 관계, 그게 인사다. 개성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이 다른게 그 이유다. 배려의 반대가 해(害)를 입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공동체는 이를 제어하기위해 모두의 약속인 ‘법’ 을 만든것이며 다른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에 대해 법으로 제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크게 정착된 사회가 선진사회이며, 그 반대가 후진사회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강제에 우선해서 ‘교육’ 으로 형성되는 문화적인 정서이기도 하다.
나는 연령적으로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수 있는 구세대다. 그리고 오늘을 성찰하면서 내일을 예측해 볼수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어제는, 그게 본래 우리의 모습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어제를 알면 오늘의 변화가 가지는 내용이 발전인지 타락인지 가늠할수 있다. 그래서 이미 언급했던 얘기를 다시하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때, 엄친께서는 전투에 참가했고, 자당과 우리 삼남매는 시골로 피난,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농가에 얹혀살았다. 큰 부락은 아니었지만 그댁은 제법 농사가 컸고 사람들도 무던했다. 어느날 그집에 먼곳에서 손님이 왔고, 논에서 일하고있는 주인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는 뛰어갔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온 농부는 먼저 얼굴과 손발을 깨끗하게 씼은후 방에 들어가 두루마기까지 갖춘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랑으로 나갔다. 그 다음장면을 나는 평생 잊지못한다. 그렇게 강열하게 뇌리에 각인된 것이다.
사랑방에서, 주인과 손님은 서로 마주선후, 정중하게 엎드려 맞절을 했다. 그건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상대방 가족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그 손님은 집안의 혼사문제 때문에 온것 같았으며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신중한 자세로 얘기를 나눴다. 특별히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아닌, 평범한 시골의 농부들 이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에서 그들은 예의(禮儀)가 분명했다. 그때의 우리사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예의가 무엇인가.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함께 지켜야할 인사-예절이다. 예의는 남에게 폐(幣)가 되거나 실례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며 자세다. 그래서 예의-예절이 분명한 사회는 빈부의 문제를 떠나 모두가 ‘안정적’ 으로 살아갈수 있다. 상대적인 배려가 모든사람을 감싸안고 있기대문에 ‘불안’ 이 없는것이다. 우리의 어제가 그러했다. 그래서 우리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가 자라면서 가장많이 들었던 말은, ‘겁이 없다’ 는 것이었다. 실제로, 갑자기 큰 소리가 나거나 가까이에서 무엇이 무너지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래고 소리까지 지른다. 그럴때, 나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지고 더 냉정해진다. 그건 아마도 타고난 성품일것이다. 그런데, 요지음 나는 겁이나고, 무서운 일들을 자주 만난다.그래서 가급적 외출을 삼가려고 한다. 은퇴생활을 하기 때문에 내가 싫으면 외출을 안 할수도 있다. 현역이었을때는 내가 싫어도 해야할 일이 있으니 피할수 없었지만 지금은 선택 할수 있기 때문에 두려운 일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겁나는 일들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것이 아니다. 예의가 붕괴된 자리에 독버섯처럼 솟아난 사람들의 ‘무례(無禮)함’ 이 그것이다. 함께 살고있는 사람들의 ‘사회적분위기’가 두렵고 무섭다. 너무 각박하고, 살벌하고, 전투적이고, 무례하다. 풍선과 송곳끝처럼 첨예하고, 칼끝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차 있다.
내 친구들이 자주 내게 하는말이 있다. ‘관찰력이 예리하고 기록성이 뛰어나다’ 는 것이다. 사실 내게 그런면이 있는것이 사실이다. 어떤면에서 나는 ‘독서광 이자 메모광’ 이기도 하다. 메모용 카드와 필기구는 항상 지참하고 다니는게 습관이다. 그리고 그게 어디든 관계없이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메모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많은 글을 쓰면서도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그렇게 기록했던 자료중에서 이제 소개하려는 에피소드들은 지금의 ‘위기’ 를 설명할수있는 현실적인 방편이 될수있을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서, 바닥에 음식물쓰레기의 국물이 흘러서 보기에도 좋지않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던 어느날 현장에서 장 본인을 보게됐다. 젊은주부가 들고있는 음식물쓰레기 그릇에서 고약한냄새의 국물이 계속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본인은 완전 무표정이었다. 그 뻔뻔한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쓰는 공공재(公共財)를 더럽히면서도 그게 왜 잘못인지를 모르는, 더불어 함께 살수없는 인간형이 그랬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얼굴인가. 그것은 이웃이 아니라 단지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대중음식점은 대표적인 공공의 공간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특히 배려해야 하는 ‘식사하는 장소’ 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리 넓지도 않은 식당안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애들이 있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건드리게 되고 달리다 넘어져 울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애들의 젊은부모는 그 망종들을 전혀 제어하지 않는다. 또, 어떤 아낙들은, 의자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앉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더러운 발바닥을 봐야한다. 그런 자세로 앉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식사하면서 그 발바닥을 보게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방석에 앉아야 하는 식당에서, 새 일행이 들어왔을때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식탁밑의 방석들을 꺼내 건너편 일행이 앉을자리에 던져놓는다. 옆에서 이미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그 먼지를 마셔야하는데 그게 왜 나쁜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는 정말 이런 사람들이 두렵고 무섭다.
어느날 아침, 주차공간에서 시동을 건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발했지만 곧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내 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고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차옆에 선 사람과 얘기하고 있었다. 내 생각엔,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곧 얘기를 끝내고 그차가 출발할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얘기는 끝없이 계속되었고, 나는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긴 얘기가 끝나고 차가 출발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뒤에서 오래동안 기다리는 타인의 차는 안중에 없는것이다. 더 심한 경우는, 자기가 편하기 위해 간선도로의 횡단보도에 차를 세우고 볼일보러 가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엔 진행하다 도로 중앙에 차를 세우고 사람이 내릴때도 있다. 다른차, 다른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타인은 그 안중에도 없는 이런 원시인들이 나는 두렵고 겁난다. 정말 그들은 칼을 든 강도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존재들이다.
병원의 환자대기실. 요지음은 병원마다 경쟁이 심해 대기실의 의자도 고급화 됐고 분위기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몸이아파 진찰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실에서 10분에서 20분 이상 큰 소리로 휴대폰 통화를 하는 무지하고 무례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환자는 견디다 못해 자리를 뜨기까지한다. 그 통화내용도 ‘잡담과 수다’ 수준이다. 그런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 이다. 세상에 자기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망종이 되는것이다. 모두가 자기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을 보면서도 새치기 하는 사람들, 차선을 바꾸기 위해 신호를 넣어도 절대 공간을 내 주지않는 꼬인사람들. 익명성 이라는 성채뒤에 숨어 온갖 악담을 쏟아내는 악플들. 실내용 슬리퍼를 끌고 거리로 나서는 무지하고 천박한 여자들, 그리고 그들이 계단에서 내는 귀를찢는 소리들, 모두가 함께 살수없는,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무섭고 두려운 반사회적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나쁜사람이 거의없다. 착하고, 정이많고, 이해력도 빨라 말귀를 쉽게 알아듣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못쓰게 만들었는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사하는법, 예의와 배려를 배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입도구과목인 국,영,수 에 매달려 있는동안 ‘인간’ 이 되기위한 도덕, 윤리교육을 받지 못한것이다.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수 있겠는가. 나쁜줄 알면서 일부러 나쁜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건 범죄자일 뿐이다. 더 무서운것은, 그들이 가정에서 키우는 다음세대들이다. 십중팔구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사회가 될것이며 그런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인간답게 살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 지는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진정한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사-人事 가 없으면 그게 정글이다. 과연 누가 이일을 바로잡을 것인가. 그래서 국가리더십이 절실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미 소는 잃었지만 다음세대를 위해 외양간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인구의 228%인 1.073만여명이 불교도 이며, 18.3%인 863만여명이 개신교 신자다. 그리고 10,9%인 515만여명이 로마카톨릭이다. 실로 전체인구의 52%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셈이다. (2005년 이후의 자료는 부풀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신뢰할 수가 없다.) 그 종교들이 살아있어 순기능을 했다면 지금의 우리사회가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발복(發福) 과 기복(祈福), 그리고 엄격한 조직의 냉담함으로 미신화되고 변질 되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길에 버려진채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게 지금의 한국종교다. 종교가 그 본래의 순기능을 다 한다면 우리사회는 달라질수밖에 없다. ‘대자대비’ 와 ‘사랑’ 은 곧 다른사람에 대한 ‘배려’ 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종교지도자들이 대오각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사회공동체가 이대로 가서는 절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지네딘 지단(Zinedine Yazid Zidane 1972.6.23) 이 누군지는 다 알고있을 것이다. 1998, 2000, 2003년 FIFA(국제축구연맹) 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을 연속 수상한바 있으며, 유럽축구연맹이 선정하는 ‘50년 역사상 최고의선수’ 로 뽑히기도 했다. 미드필더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지단은 세계 정상의 선수로서 그 시야가 넓고, 패싱이 정확하며, 빠른 스피드와 현란한 드리볼로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은퇴후 그라운드에서 그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모든 팬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기도 하다. 그는 축구의 아티스트였으며 21세기 축구황제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축구에서 다시 그만한 선수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가 떠난 자리는 더 크게보인다.
지단은 프랑스의 남부 항구도시 말세이유에서 출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독학으로 축구를 배웠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1998년 프랑스의 1부리그 칸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프랑스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1992년 프로선수로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 FC지롱댕 보르도팀으로 이적한다. 1994년 프랑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같은해 신인선수상을 받았다. 1996년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옮겼으며 2001년 스페인의 유명한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기라성같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의 존재는 뚜렸했으며 침착한 자세로 공을 적재적소로 배급하던 그의 놀라운 기량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진정 21세기 ‘축구의 황제’ 였다.
마르세이유에 정착한 가난한 그의 부모는 알제리 출신의 이민자들 이었다. 평소 지단이 알제리에 대해 나타낸 관심과 애정은 그의 뿌리가 알제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로코, 알제리, 튀지지, 리비아는 아프리카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이들 나라들을 묶어 ‘마그레브-Maghreb' 라고 부른다. 리비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 였으며,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는 프랑스의 식민지와 보호령이었다. 마그레브지역과 사하라이남의 아프리카는 전혀 다른세계다. 지금도 마그레브 지역을 여행해 보면 유럽이 남긴 큰 족적을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다. 예를들어, 카사불랑카의 호텔에 투숙한후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대리석이 깔린 화려한 식당에 내려가면 한 테이블에 두명의 아름다운 모로코 여종업원들이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자상한 서브를 제공한다. 흡사 왕족이 된 기분이다. 더 재미있는것은 같은 나라인데도 지브랄탈해협이 가까운 북쪽지역에 가면 스페인어가 등장하는 사실이다. 역사는 그렇게 재미있다. 탕 헤르에서 훼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 알제시라스에 올라서면 바로 그라나다가 있는 안달루시아가 아닌가. ‘안달루시아를 보기전에는 눈을감지말라’ 유럽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지금의 알제리는 1962년에 독립했으며, 국토가 238만여 평방키로로 이집트보다 크다. 모로코와 튀니지 사이에 위치한 알제리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며 베르베르인이 99%인 아랍국가로서 대부분이 수니파무슬림들이다. 2008년기준 인구는 3.376만여명이며 1인당 GDP는 3.825달러, 평균수명 73.7세다. 비록 독재와 부패가 있다해도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의 여러나라들과는 비교할수 없이 풍요로운 나라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54년 민족해방전선(FLN) 을 중심으로 8년간 프랑스와 격열한 알제리전쟁을 벌인 끝에 독립했다. 실로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에 알제리인이 많은것은 이런 관계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단도 알제리계 프랑스인인 것이다.
알제리가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것은 ‘파리채’ 때문이었다. 1827년 4월의 어느날, 당시 알제리는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고있었으며 술탄이 임명한 ‘파샤’ 가 지배자였다. 그 직책을 ‘데이-dey' 라고 불렀다. 그날, 알제리의 ‘데이’ 인 ‘후사인’은 마침 프랑스 영사를 접견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내용을 알수없는 대화 때문에 크게 화가난 후사인은 파리채로 프랑스영사를 세 번이나 후려친 일이 벌어졌다. 크게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정부는 즉각 알제리에 함대를 파견했으며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다. 아무리 오스만터키가 뒤에 있다해도 후사인은 사과하는게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 요구를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프랑스정부는 영사와 프랑스거류민 모두를 배에 태운후 수도인 알제항을 봉쇄했으며, 서쪽으로 32킬로 떨어진 ‘시디페르루크’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해군은 바다에서 대규모 포격을 시작했으며 육군이 이에가세, 단 며칠만에 수도알제는 함락되었으며 이로서 132년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파리채 때문에.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한복을 차려입은 어른들을 거의 보지못했다. 애들은 더러 봤지만, 해마다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게 사실이다. 제대로 갖추어입은 한복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 근자에는 너무 요란한 무늬와 색깔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개량한복도 있지만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10여년을 미국인들과 생활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그들 대부분이 한복에 매료 되어 귀국할때는 자기가 입을 한복 한 벌씩을 준비하는게 보통이었다. 특히 우리의 고 가구에 매료된 미국인들도 많았다. 그들이 가지고있는 고 가구에 대한 애착은 한국인들 보다 더 했다. 진품은 반출이 안되기 때문에 모조품을 사 가지고 가는이들도 많았다. 이상한것은, 한복과 국악이 대중화되지 않고있는 점이다. 한복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우리의 국악은 더 없이 청아한 음악이다. 그런데도 이 두가지는 대중화, 일상화 되지못하고 있다. 가장 현실적이고 쉬운대답은, 한복은 불편하며 만들기가 까다롭고, 국악은 재미가 없기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서양식 복장을 선호하는것은 유행보다는 그 실용성, 편리성, 효율성 때문이다. 한복을 입고는 지금과 같은 스피디한 시대를 살수가 없다. 똑같이 서양음악이 국악을 밀어낸것도 재미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악육성을 시도해도 대중화 되지 못하는게 그 때문이다. 섭섭하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건강전문지 ‘헬스’ 가 선정한 세계의 5대 건강식품에 우리의 김치가 포함됐다. 스페인산 올리브오일, 그리스의 요구르트, 일본의 두부, 인도의 덴틸콩, 그리고 우리의 김치가 그것이다. 2가지는 발효식품이고, 3가지는 아시아식품이다. 우리의 김치가 세계 모든나라 식탁에 오를날도 머지않았다. 그리고 김치는 중독성식품이기 때문에 그 다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LG에서 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후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이윤호씨가 장관직을 물러난후 한 얘기가 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단순하게 하고, 느리게 행동하는 세가지일에 집중하겠다는게 그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게 무엇인가. 사람들 마음속에 가득차 있는게 무엇인가. 탐욕-욕심이다. 과식하면 괴롭듯이 마음속에 잡것이 가득하면 병이된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 끄집어내 버리고 홀가분해 지겠다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다. 생각을 단순하게 한다는것은 무엇인가. 단순해 진다는건 어떤 한가지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매달려있던 온갖 잡것들을 다 동댕이쳐 버리고 한가지만 생각 하겠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겠는가. 자기의 근본을 생각하는 것이다. 뿌리만 생각하는 것이다. 체중은 줄지만 정신은 더 맑아지는게 그런것이다. 느리게 행동하겠다는 것은, 그동안 뛰기만 하면서 바쁘게 살았다는 뜻이다. 본래의 자기속도, 패이스를 되찾겠다는 다짐이다. 본래의 ‘자기’ 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다. 모두가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빨리 빨리 살고있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슬쩍 그 대열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걸어보면 그 이유를 알게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느리게 걸어보는 시간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왜 가끔 심호흡을 하겠는가.
서화숙씨는 22년간의 아파트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편리함에서 불편함으로 스스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최근 ‘마당의 순례자’ 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단독주택이 좋은것은, 나와 남이 다르다는 점이다. 똑같은 집에살면 사람들은 자꾸 그 내용을 비교해 보게된다. 단독주택은 처음부터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하니까 나는 나일뿐, 남과 비교하려 들지않는다. 이게 얼마나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지 겪어봐야 안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얘기다. 서화숙씨는 용감하게 토끼장을 탈출한 것이다.
2009년 9월현재, 우리나라의 전체가구수는 1.691만 6.966가구다. 이중 절반이상이 아파트에 살고있다. 1958년 11월, 중앙산업이 성북구종암동 고대옆 언덕에 지은 ‘종암아파트’ 가 한국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다. 그리고 5.16 혁명후, 주택난 해소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주택공사에 지시해 지은 6층단지의 아파트가 ‘마포아파트’ 다. 단지형 아파트의 효시다. 불과 50년, 두세대도 안되는 짧은기간에 전국가구의 절반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기록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정말 대단한 민족이 아닐수 없다. 외국인 관광코스에 일부 여행사가 일산의 아파트단지를 포함 시킨것은 세계 어디에도 그런곳이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구경거리고 될 수 있고, 관광상품도 될수있다. 앞으로 아파트는 크게 두가지 종류로 진화된다. 한쪽은 더 고급스러운 주거공간으로 발전, 가진자들의 게토가 될것이고, 다른한쪽은 슬럼-slum 이 되는것이다. 그게 정해진 코스다. 무너지기 직전의 와우아파트를 연상하면 된다.
삶의 껍데기-형식-값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삶의 안-질-가치를 지키려는 사람은 아파트를 떠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게토에 갈 자신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파트, 특히 그 획일적인 거실의 구조가 TV를 군림하게한 상업주의에서 벗어나야 ‘나’ 를 찾을수 있다. 서로 다르게 생겼듯이 서로다르게, 개성적으로 살아야 하는게 인간-인생이 아니겠는가. 가을은, 그래서 많은생각을 하게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
서울에서는, 자기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외국인을 볼수가 없다. 그 대답은, 선진국에 가서 차를 빌려타고 여행해보면 알게된다. 문명-文明 으로서의 자동차는 함께 가지고 있지만 그 차를 운용하는 운전질서, 교통질서인 문화-文化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한쪽이 교통질서가 이미 자리잡고 있다면 다른한쪽은 아직 정글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신있게 운전할수 있는 사람도 카이로에서는 운전할수 없다. 거긴 더 원시적인 정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북을 관통하는 영국의 고속도로 에서는 외국인인 초보운전자도 안심하고 자동차를 운전할수 있다. 끼어들기, 과속, 무모한 앞지르기등의 난폭운전이 없기 때문이다. 120키로의 속도지만 모두가 물 흐르듯이 정연하고 차분하게 운전하고 있다. 모든 도로에서 그렇다. 이건 남에게서 들은 얘기가 아니라 내가 직접체험한 일이다. 랜트카로 영국을 일주한후 내린 결론이 그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선진국의 자동차문화는 이미 3.5세대다. 우리는 지금 1.5세대를 겨우 넘기는 중이다. 자동차라는 문명이 등장한 이후 그들은 10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오늘의 운전질서-교통문화를 일구어왔다. 반면 우리는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겨우 버스라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던 세대가 갑자기 자가용승용차를 가지게 됐다. 내가 초등학생 이었을때, 우리집에는 엄친의 일본제 커다란 자전거가 있었다. 그때는 자전거가 있는집도 드물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엔 그게 어디든 걸어서 다녔다. 대학생이 되어 전차와 기차를 이용했으며 그때 시내버스가 등장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후에는 회사가 제공하는 통근버스를 이용했다. 과장이 되었을때 처음으로 일제의 ‘브리사’ 승용차를 구입했다. 그게 1974년. 지금 우리집 승용차는 그후 7번째 바뀐것이다.
영국은 모든차량이 좌측통행하고, 운전석은 오른쪽이다. 때문에 변속레버는 왼손으로 조작해야 한다. 영국에 가서 운전해야하는 우리들 에게는 대단히 불편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에는 영국의 오래된 교통문화의 시대적 전통이 배어있다. 그들에게는 자동차 이전 ‘마차’ 라는 운송수단이 있었으며 그게 대중교통수단 이었다. 마부는 오른쪽에 앉아 말들을 부렸으며 특히 오른손에 긴 채찍을 들고 휘둘렀다. 자나다니는 행인들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위해 마차는 좌측통행을 했다. 그 전통이 그대로 자동차에 남은것이 지금의 영국교통체계다. 일본이 그 흉내를 내고있는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미국에 비해 유럽의 길들은 좁은편이다. 마차들이 다니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은 작은차 생산에 앞설수 있었으며 산악지대의 좁은도로를 달릴수 있는 뛰어난 성능의 엔진과 유선형의 차체개발에 앞설수밖에 없었다. 디자인, 크기, 성능, 연비에서 미국을 앞서는 자동차문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문화적 전통이 없기 때문에 일대 혼란을 겪고있는 것이다.
내년 11월이면 우리나라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단군이래 최대규모의 ‘국제회의’ 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88올림픽에 비견할만한 ‘계기’ 가 될수있다. 그래서 벌써부터 나라의 품격을 업 그레이드 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있다. 한 가정도 큰일을 치르려면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과정마다 여러 가지 고비를 겪으면서 행사가 끝났을때는 상당한 ‘발전’ 이 있었음을 실감할수 있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벌써 정부차원의 준비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20개의 선진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따라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제공해야하는 숙박시설들, 회의장, 정상회의 세련된 진행, 의제의 선택과 결실등, G20은 대한민국이 얻어낸 최고의 국제적 ‘찬스’ 라고 할수있다. 대내적 으로도, 대외적 으로도 그것은 놀라운 기회가 될수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수준을 되 돌아볼 현실적인 필요가 있다.
1960-70 년대를 ‘압축성장의 시기’ 라고 부른다. 특히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기간동안 철강회사에 근무하면서 그 소용돌이를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고생도 자심했지만 보람도 그만큼 컸던, 한국이 경제적으로 웅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압축성장이 무엇인가. 압축(壓縮)은 압력을 주어 부피를 줄이는것이며, 문장을 줄여 짧게하는 것이다. 따라서 압축성장은, 필요한 만큼의 여러과정들을 생략한채 건더뛴, 빠른성장을 의미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것은, 지금 우리사회가 겪고있는 온갖 혼란은 뒤늦게 그 건너뛰었던 과정들을 채우느라 지불하는 대가라고 봐야한다. 두발로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마차’ 라는 과정없이 자동차를 탄게 그런것이다. 나쁘다는게 아니라 ‘부족’ 했다는 뜻이다. 필요한 단계가 생략됐다면 지금 그 단계들을 다시 밟느라고 일대 혼란과 진통을 겪고 있는것이다.
압축성장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후유증(後遺症)을 남긴다. 후유증은, 어떤 일을 치르고 난 뒤에 생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이르는 말이며, 부작용(副作用)은 어떤 약이라 해도 병을 낫게하는 작용에 곁들여 해로운 작용도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들어 진통제가 식욕부진을 일으키는게 그런것이다. 부작용은 어떤일에 곁들여 일어나는 바람직하지 못한일에 대해서도 쓰이는말이다. 쉽게말해, 압축성장은 성장후의 결과에서 부작용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과정을 제대로 다 거친 성장은 그 결과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압축성장은 물량이 내용을 앞서기 때문에 문화적 부작용을 낳게된다. 문명이 문화로 자리매김 하지 못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우리사회의 온갖 ‘상스러움-천박함’ 이 바로 그 핵심적인 내용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졸부들의 ‘천민자본주의’ 임은 말할것도 없다.
모든 선진문명국들은 전통적으로 그것을 떠 받치고있는 세 개의 큰 기둥을 가지고 있다. 곧 정치에서의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에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사회공동체를 유지케 하는 법질서가 그것이다. 정치체제의 중요성은, 북쪽의 1인독재의 전체주의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이미 분명한 결판이 났다. 인간의 기본권이 유린된 체제가 발전할수는 없다. 선군정치(先軍政治)를 외치는 병영국가의 국민은 모두가 포로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동안 충분히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와 풍요로움이 상대적으로 어떤것인지 체험적으로 알고있다. 미국의 의회조사국(CRS) 은, 2008년 북한의 수출이 28억불 이라고 밝혔다. 같은해 우리는 4,000억불, 비교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차다. 전체주의계획경제와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차이는 더 긴 설명이 필요없다. 아무리 반시장, 반기업, 반자본주의 정서가 있다해도 우리가 이만큼 잘살고 있는것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채택한 결과인 것이다. 이승만의 ‘선택’이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나 ‘법질서-준법정신’에서 우리는 낙제점이다. 불법, 편법이 판치는게 지금의 우리사회다. 입법부인 ‘국회’ 부터가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의회로 낙인찍혔다. 그들의 ‘무법천지’ 는 전국, 전국민을 크게 오염시켰다. 여기에 더해, 지난 반세기동안 압축성장과 투쟁적인 민주화과정을 거치면서 법질서 자체가 크게왜곡된 측면이 강하다. 정부주도의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거기에 참여, 많은 이득을 보는 자들과 소외된 계층이 발생했으며, 법과 공권력이 그들의 편이라는 편견이 널리퍼졌다. 따라서 법을 지키지않고 오히려 그것을 공격하는것이 정의와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되었으며 이로서 불법, 편법, 범법이 국민의 일상이 되고말았다.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극단적인 좌파, 직업적인 운동권, 낙오한 노동자들이 주도했으며, 그뒤 친북좌파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화와 인권문제는 이들이 ‘독점’ 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그들의 이념, 구호, 불법집단행동에 대해 비판하면 무조건 독재, 반인권, 반민주세력 으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독선의 시절이었다. 이성(理性) 과 분별력(分別力), 그리고 제3의 생각이 설 자리가 없는 무지와 독단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 후유증이 지금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부작용을 낳아 일대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것이다. 압축성장과 폭력적민주화운동은 그 상승작용으로 지금의 우리사회를 만인이 만인을 향해 쟁투하는 갈등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동안 모든 대형시위와 집회에서, 공권력-경찰이 공격받은것은 법질서의 붕괴가 어느수준 인지를 알게해 줬다. 질서는 차례다. 그리고 법질서는 그 차례를 법으로 지키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에 거침없이 새치기가 끼어들고, 공권력-경찰이 그 횡포를 막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무법천지’ 다. 지금의 우리사회가 그 꼴이다.
개인의 가정이라해도 귀한 손님을 맞기위해서는 준비를 한다. G20의 정상회의는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 사회를 한단계 업 그레이드 시킬수 있는 절호의 주어진 기회다. 우선, 유권자의 힘으로 ‘무법,폭력 국회’ 를 엎어야 한다. 지금의 국회는 우리의 정치발전을 가로막고있는 커다란 거침돌일 뿐이다. 다음 총선에서 전부 새 사람을 뽑는것이 우선은 최선의 방법이다. 다음이 우리모두가 준법정신으로 ‘법질서’ 를 확실하게 세우는 일이다. 거의 평생을 가까이 지내고 있는 미국인 친구가 내게 한 말이있다. 그는 30년이상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미국국민들이 법을 잘 지키는것은 사실이다. 확실히 한국사회보다는 법질서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사람들이 한국사람들 보다 착하거나 더 정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착하고, 성실하고, 정(情) 많기로 말한다면 어떤 나라도 한국을 따라올수 없다. 차이는 단 한가지, 미국에서는 법을 어기면 그 처벌이 아주 가혹하다. 개인적으로 불이익이 크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손해가 되고, 신체적 으로도 부자유해 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면 한국은 법을 어겨도 처벌이 너무 느슨하다. 그러니 자꾸 법을 어기게 되는것이다. 손해도 별로 없는데 누가 그 불편한 법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흉기를 들고 공권력-경찰을 공격하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나라에서 법질서 확립은 요원한 얘기다. 시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하기 전에 법을 어겼을경우의 처벌부터 강화해야 하는 소이가 거기에 있다. 하나의 사회공동체가 모두가 편하게 사는길은 ‘법질서’ 를 세우는 길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법’ 이 모두의 ‘약속’ 이라면 전체를 위해 약속-법을 어긴 범법자는 가혹하게 다뤄야 한다. ‘법’ 이 무서우면 ‘법질서’ 는 저절로 세워진다. 압축성장과 폭력적민주화운동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길이 그 안에 있음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옛날에 현자(賢者) 한분이 계셨다. 그의 놀라운 가르침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그 소문은 널리 퍼져 그의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가르치기 위해 건물이 지어졌고, 강론(講論)도 시간표에 따라 행해졌다. 그 현자에게는 오래동안 기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강론시간이면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기도 하고 현자의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해서 크게 방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궁리 끝에 현자의 강론이 있는동안 그 고양이를 현자의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 묶어두기로 했다. 오랜시일이 지난후, 그 현자는 교주가 되었고 그 가르침은 하나의 종교를 이루었다. 몇세대가 지난후 그의 후계자들이 대를 이어 지혜의 말씀을 가르쳤고 강론시간은 형식을 갖춘 예배시간이 되었다. 놀라운것은, 그 현자의 후계자들이 강론하는 그시간, 가까이에 있는 기둥에는 고양이가 묶여있는 것이다. 처음, 기둥에 묶였던 고양이는 하나의 전승이 되어 형식이 된 것이다. 종교와 그 내용, 그리고 형식의 관계가 그러하다.
무릇 세상의 모든일은 형식이라는 그릇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수가 없다. 그렇게 형식과 내용은 뗄수없는 관계에 있는것이며, 내용이 승하면 형식이 위축되고, 반대로 형식이 승하면 내용이 변질된다. 종교의 경우 이런현상이 심한 편이며 세월이 흐르면 형식이 내용을 완전히 잠식 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러 종교안에 있는 무서운 근본주의가 그것이다. 안식일이기 때문에 수도꼭지도 잠그지 못하고, 전등의 스위치도 돌려끄지 못하는 오늘의 유대교가 그러하며, 테러리즘으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이슬람의 잘못된 근본주의가 그러하다. 축자영감설을 고집하고, 창조론에 집착하는 개신교의 모습도 별로 다를게 없는 근본주의다. 종교의 극단적인 형식화-근본주의는 그래서 아주 무섭다. 주께서는 이런 형식화에 대해 대단히 격열한 어조로 경고하신바 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것이다.’
나는 아테네에서 희랍정교회의 서서드리는 예배에 참석해 봤으며,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봤다. 빠리의 로테르담 성당과 서울에 있는 성당에서 여러번 미사에도 참석해 봤다. 나는 장로교집안에서 태어난 크리스챤이다. 서로다른 예배형식. 서로다른 건축양식과 성직자들의 복장, 서로다른 번역성경과 교회용어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서로 반목했던 모든 일들은 ‘인간’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한분예수, 하나의 성경에서 이렇게 서로다른 ‘기독교’ 가 생긴것은 전적으로 부족한 인간들 때문이다. 초대교회 이후 크게 갈라지기 전까지의 기독교는 ‘catholic church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 였다. 희랍정교회, 로마카톨릭, 러시아정교회, 성공회,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인간들 때문에 쪼개진 ‘보편적인 하나의교회’ 가 찢어진 이름들이다.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각자의 형식은 기독교의 신앙적인 ‘내용’ 을 능가하는 변질을 초래하고 말았다.
성경말씀 앞에서 더 정직해 진다면, 지금의 주일 오전예배들, 찬양예배와 수요예배, 금요금식기도회와 철야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는 성경에는 없는 형식들이다. 대부분의 직분과 교리등도 성경에는 없다. ‘안식일’ 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임으로 주일과는 무관한 샘족의 종교일과일 뿐이다. 지금 상당수의 개신교 교회들은 보통날도 주부들을 예배당에 붙들어 두고있다. 때문에 어린애들이 집밖에서 배회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예배당에 오래있는것과 구원은 무관한 것이다. 그건 경계해야할 공적주의일 뿐이다. 시장어귀에서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는 사악한 부자에 대해 주께서 어떤말씀을 하셨는가.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것은, ‘구원’ 받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그렇게 중요한 ‘구원’ 에 대해 제대로, 신학적으로 맞는 대답을 할수있는 교인은 거의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기복에는 그렇게 열심인 교인들이 ‘은혜’ 와 ‘구원’ 에 대해 올바른 설명을 못하는 것은 신앙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이 빈약한 신앙을 가지게 된것이다. 교회는 ‘상식’ 과 함께 ‘신앙’ 에 대해서도 교인들을 성경내용대로 교육해야 한다. 주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와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서 안에만 60개가 넘는 예화를 남기셨다. 그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가르침을 담고있다. 그분은 정말 훌륭한 교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기독교의 핵심은 가르치심-말씀인 것이다. 그 말씀이 성경책이다.
말씀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방편이라면, 우리와 그 말씀은 어떤 관계에 있는것인가. 이제 하나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 하나님앞에 드러나지 않는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살아있는것은 기능(機能) 이 있다. 거기에 힘까지 실리면 그 기능은 참으로 막강한것이 된다. ‘마케도니아의 긴창이 로마의 단검에 졌다’ 는 서양속담이 있다. 회전반경이 큰 긴창사이로 파고든 로마병사의 쌍날칼은 그렇게 무서웠다. 그 칼, 말씀의 기능, 힘이 우리를 산산조각 낸다는 뜻이다. 그게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한 참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그 날카로운, 살아계신 말씀앞에 매일 서야한다. 살아있는것은 곧 ‘일상적-日常的’ 이라는 뜻이다. 예배당의 문이 경계가 되어 그 안과 밖의 생활이 서로다르다면, 그 사람은 말씀앞에 서 있는것이 아니다. 한국개신교의 핵심적인 문제가 그것이다. ‘살아계신 말씀’ 은 없고, 인간의 인간적인 욕심과 허영심, 탐욕으로 만든 껍데기-왜곡된 형식에 매달려 그게 신앙생활인줄 알고있다. 60-70년대의 압축성장이 몰고온 물량주의가 질적으로 변환되지 못한채 지금까지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를 딴것이 되게했다. 살아계신 말씀도, 인간이 그 말씀앞에 서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이는, 종교자체는 변할수 없지만 인간에 의해 그 껍데기가 못쓰게 되는것과 같은 이치다. 기독교 2천년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다.
우리모두는 생존하기 위해 매일 음식을 먹는다. 똑같이 정신적 존재이기도 한 인간은 ‘정신의 양식’ 도 필수적이다. 특히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는 ‘철학’ 이상의 양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것을 ‘영의 양식’ 이라고 부른다. 비록 성경책 자체는 오래동안의 필사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근본, 그 의미-뜻에서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살아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부른다. 영의 양식을 먹지않는것, 성경을 읽지않는 생활에서 어떻게 구원이 기대될수 있겠는가. 지금은 성경을 읽지않는 크리스챤들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모두가 사이비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짜다. 사실은 자기들이 가짜인줄도 모르는 가짜들이다.
살아계신 말씀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지않고는 크리스챤이 될수없다. 중생-重生, 거듭난다는게 그 뜻이다. 회개는 그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이다. 이게 쉬운일인가. 거개가 걸려넘어져 일어나지도 못한다. 교회는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교회, 에클레시아는 본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전혀 강제가 없는곳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발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자발적이 무엇인가. 스스로 결단했다는 뜻이다. 스스로 살아있는 기능-그 힘앞에 나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사람들이, 그래서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라 하는 분을 따르는 자들이 된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너무나 쉽게 자기를 크리스챤이라 부른다. 전혀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들이 자기를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기만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다. 교회가 변질되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갈릴리 나사렛은, 너무나 변방에 위치한 가난한 시골이었기에 나사렛 예수는 인간적으로도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그런데, 그 나사렛 청년의 가르침은 2천여년동안 이어져 내려왔으며 지금은 지구인구의 33%, 22억여명이 그분을 ‘주님’ 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 가르치심-말씀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장구한 시간과 드넓은 공간을 뛰어넘는 ‘진리’ 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교회는 수도없이 갈라졌지만 ‘살아계신 말씀’ 은 오직 하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진정 구원받기를 염원한다면 그 말씀앞에 서야한다. 성경을 읽는게 그 일이다. 신앙생활에서 ‘살아계신말씀’을 읽는일 보다 더 중요한것은 단연코 없다. 나머지는 모두가 내용을 위한 형식일 뿐이다. 그래서 형식은 언제나 최소한 이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는것은 ‘살아계신 말씀’ 뿐이다. |
우리민족에게 있어. 추석과 설은 최대의 명절이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는 ‘민족대이동’ 이라는 표현으로 그 규모를 설명한다. 그 누구에게나 고향은 자기의 뿌리이며 혈육-가족이 있는 근거지이다. 그래서 고향은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곳이기도 하다. 타향살이의 서러움은 고향이 있기에 가지는 정서다. 그런데 이 민족적인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은 갈 처지가 되지못해 못가는 사람들이다. 지금 자기의 형편으로는 가족과 친척, 동네 사람들 앞에 설수가 없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직업 때문에(연속근무자들) 못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 이유가 어떠하든 고향에 가지 못한다는것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고향에 갈수있는 현실적인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고향에 못가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내 본가(本家)는 평안북도 강계(江界)다. ‘강계미인' 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승용차로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도착할수 있는데도 그 고향에 가지 못한다. 그래서 남북분단은, 우리가족 에게는 언제나 가슴아픈 현실이다. 1946년 여름, 야밤에 인민군의 감시를 피해 38선을 넘은이후, 부모님도 나도 고향에 가보지 못했다. 이미 부모님들은 돌아가셨고, 70이 넘은 나도 고향에 가 볼수있다는 희망한 있을뿐 그게 이루어질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쉽게 고향을 찾아갈수 있는 사람들은 고향은 있지만 갈수없는 사람들의 아픈마음을 짐작도 할수없을 것이다. 특히 나처럼 철이들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선명하게 기억 한다. 그 고향에 갈수 없다는것은 비극이다. 사실은, 갈수도 있는데, 못가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2009년 7월현재. 생존 이산가족은 8만 7.586명이며, 이중 90세 이상 고령자는 4.518명으로 4.7%이며, 70세 이상은 76%에 이른다. 이들의 직계가족만도 800만이나 된다. 이미 2007년에 4.303명이, 2008년에는 5.626명이 고령으로 사망했으며 2009년에는 그 숫자가 6000여명에 이를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대한적십자사가 접수한 ‘이산가족상봉 신청자’ 는 12만 7.500여명이다. 이중 3분의 1인 4만1200여명은 끝내 혈육을 만나지 못한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9월26일부터 28일까지 금강산의 이산가족면회소 에서는 남측방문단 97명이 북한에 살고있는 가족 240명과 상봉했으며 2차로 29일부터 10월1일까지 북측방문단 99명이 남쪽의 가족 449명과 만나게 된다. 2000년 8월 제1차 이산가족상봉 이후 2007년까지 남과북에서 각각 1700여 가족씩 모두 1만6000여명이 상봉의 감격을 나눴다. 이는 1년에, 남쪽의 12만이 넘는 신청자중 200여명 정도가 북쪽가족을 만났다는 얘기다. 예를들어 그 숫자를 크게늘려 1년에 1000명씩 상봉한다 해도 나머지 대기자 8만여명이 북쪽의 헤어진 가족을 만나는데는 80년이 걸린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온다. 고향을 떠난지 60년이 넘는 사람들이 80년을 더 기다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과북은 적십자요원 각 2명씩, 4명이 만났다. 분단이후 최초의 공식 접촉이었다. 그이후 2009년 8월 28일의 남북 적십자회담까지 남과북은 정부차원의 접촉을 595회 가졌다. 그런데도 이산가족들의 상봉문제가 그 근본에서 해결되지 않고있는것이다. 상봉대기자 8만명중, 80년이 지난후까지 살아있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일년에 기백명씩 만나는 지금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괄타결책-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의가족-혈육보다 더 가까운 관계는 없다. 누구에게는 고향은 천금보다 귀한곳이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 해마다 명절이 되면 임진각 망향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렇게 손을 놓고 있지는 못할것이다. 4년전, 82세의 한 실향민은 임진각에서 ‘이산가족상봉신청 접수증’ 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일도 있었다. 살아있는 국군포로들도 아직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무능, 졸열’ 함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이웃인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살펴보자. 大三通(대삼통-通航, 通郵, 通商)에 합의한 그들은 해운과 항공로를 열어 양쪽 주민들이 자유롭게 오가게 했으며, 우편물이 교환되고, 직거래로 통상하고 있다. 대만 타이페이의 주민이 전화로 베이징의 꽃가게에 주문, 베이징에 있는 친지에게 배달을 시킬수 있는수준이다. 지금도 매일 중국인 5000여명 이상이 대만을 방문하고 있다. 2008년 기준, 438만여명의 대만인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중국인 28만여명이 대만을 방문했다. 과거 동독과 서독의 관계도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독은 정치범의 석방대가와 고속도로 통행료등의 명목으로 60조원정도를 동독에 지불했으며, 그 대가로 동서독주민의 통행, 우편물의 교환, 동독에서의 서독TV 시청을 얻어냈다. 친북좌파 10년동안 8조원 이상을 건네주고 우리가 받은것은 ‘핵공갈’ 과 개성공단 협박뿐이다. 얘기의 차원이 다른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산가족상봉을 지켜보면서 가지는 소회(所懷)는, 중국이나 독일인들에 비해 우리민족성이 더 악랄하다는 것이다. 악랄(惡辣)은 그 하는짓이 몹시 표독하다는 뜻이며 표독(慓毒)은 그 성질이 사납고 독살스럽다는 의미다. 인도적인 문제를 정치수단화 하는게 북한의 정책이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표독스러운 것이다. 자기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게 그들이다. 대부분이 70이 넘은 노인들이 눈을 감기전에 혈육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그 간절한 ‘인간적 바램’을 무자비하게 수단화 하는게 그들이다. 지금의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보면서 더 깊은 분노를 가지지 않을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북정책은 그들의 사악한 속성을 제대로 모르고 진행한게 많다. 대표적인 것이 김대중의 ‘햇볕정책’ 이다. 이산가족들의 상봉문제를 그 근본에서 해결하려면 먼저 상대에 대해 공부부터 다시 해야한다. 무엇보다 그들을 아는게 급선무다. 그래야 해법이 나올수 있다.
북한은 왜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제한적 으로만 열고있을까. 무엇 때문에 이 시급한 문제를 대규모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것일까. 그 첫째이유는 체제 때문이다. 대규모의 남북가족 접촉은 체제를 위협할수 있는 ‘정치적요소’ 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민간인 끼리의 가족만남인 ‘이산가족상봉’ 에 쉽게 흔들릴수 있는 취약한 체제라는 의미다. 북한체제의 뿌리는 국민의 합의와 지지에 있는게 아니라 비밀경찰-폭력-강제수용소 라는 공포정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기의사와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있는 남쪽가족들 과의 접촉은 병영국가에 길들여져 있는 북한주민을 자극할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지속적이고 대규모적인 접촉은 정치적으로 기피해야할 위험요소다. 체제수호, 더 정확히는 김정일 1인독재를 위해서는 그게 무엇이든 희생할수 있는게 지금의 북한체제다. 무서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인민군 1비행사단의 책임비행사였던 이웅평상위(대위)는, 1983년 2월 25일 소련제 미그19기로 평남개천 비행장을 이륙한후 서해의 북방 한계선을 넘었으며 우리공군 F-4 의 유도로 수원비행장에 착륙, 귀순했다. 귀순후 이웅평은 한국공군에 입대했으며 대령으로 공군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중 2002년 5월4일 별세했다. 한국으로 귀순한후, 그가 쓴 글에 이런대목이 있다. ‘하루는 서해바닷가에 나가서 휴식하고 있던중 파도에 떠 밀려온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그건 남쪽의 라면봉지 였는데 뒤쪽을 읽어보니 라면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계란을 풀어넣는게 좋다는 글귀가 있었다. 그건, 남쪽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달걀을 먹을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때, 나는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얼마전,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에서, 남쪽가족이 준비해간 음식중 ‘구운김’을 집어들고 이게뭐냐고 묻는 북쪽가족이 있었다. 달걀과 김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현실’ 인 것이다.
百聞不如一見 이라는 글귀가 있다. 한번, 직접 눈으로 보는것이 귀로 백번듣는것 보다 낫다는 뜻이다. 특별히 차려입고 가지 않아도 북쪽 사람들에게 남쪽식구들은 ‘잘먹고 잘사는’ 사람 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잘먹고 죽은 귀신은 혈색도 좋다고 하지않는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고 나온 그들이 촌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보일뿐이다. 접촉은, 그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직접적이기 때문에 큰 영향을 줄수가 있다. 남쪽에서 간 가족들은 할수만 있다면 겉옷뿐 아리라 속옷까지도 다 벗어주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감시가 심해도 북쪽에서 귀하다는 달러를 혈육의 손에 쥐어주는것은 당연 하다. 다시는 더 볼수없는 가족과의 짧은 만남과 가슴아픈 헤어짐은 남쪽사람이나 북쪽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눈으로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얘기해 보고, 좋은음식을 함께 먹어본 북쪽의 식구 들은 변할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그들은 아는것이다. 북한의 허약한 체제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고싶은 마음은 지극히 인가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인도주의’ 의 문제다. 그러나 북한이 볼때 그것은 자기들이 활용할수 있는 남쪽의 ‘약점’ 이 된다. 그들은 이 약점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것이며 악명높은 ‘살라미전술’ 이 바로 그것이다. 조건을 달고, 무엇인가 요구하고, 남한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수단으로 쓰려고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그 미끼를 절대 한꺼번에 내 놓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전술을 바꿔야 한다. 가장 큰 전제는, 북한사회는 있는것이 소진되는 만큼 새것이 생산될수 없는 붕괴된 구조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피폐해 질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지금도 수많은 민간단체나 종교기관들이 북한에 대해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있다. 직, 간접으로 정부-통일부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게 무엇이든 통일부가 이를 통제, 하나로 묶은다음 ‘무기’ 로 써야한다. 이산가족상봉과 이 무기를 연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급한건 그쪽이니까. 이것이 인도주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받을 이유도 전혀없다.
이제는 그들도 이명박정권이 친북좌파정권과 다르다는것을 알고있다. 북한문제게 관한한 지금 정권이 ‘맹물’ 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 때문에 이산가족상봉문제에 대해서도 차원을 달리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을것이다. 내일 모레면 세상을 떠날 노인들이, 눈을 감기전에 혈육의 손을 단 한번이라도 잡아보고 싶어하는 피눈물나는 그 바램을 저 버려서는 안된다. 이산가족 상봉문제에 관한한, 정부가 아무리 강경한 태도로 나가도 그것을 반대할 국민은 하나도 없다. 있다면 그건 우리의 적이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하는 800만 실향민은 다른나라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북한은 체제의 이름이지만, 북녘땅은 고향산천의 이름이 아닌가. |
쿠르드족(族)은, 터키와 이라크, 그리고 이란에 결쳐있는 쿠르디스탄 지역을 주요 거주지로 하는 오래된 종족이다. 대부분이 이슬람의 수니파인 쿠르드족은 인구에서는 2.500에서 3.000만명을 헤아리는 국가수준의 규모지만 아직까지 정부를 가지고 있지못한 피압박 부족 이기도 하다. 터키와 이라크, 이란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으며 지금도 게릴라전과 함께 이를 토벌하려는 소규모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인구가 2.000만명이 넘는다면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기에 충분한 숫자다. 그런데도 오랜역사를 통해 피압박부족이 된것은 ‘정치적 조직’ 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가규모의 인구라 해도 이를 정치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면, 즉 ‘정치’ 가 없다면 소수민족이나 부족으로 남아 그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탄압을 받게된다. 정치가 없는 서러움인 것이다.
반대로 비슷한 규모의 북한은, 그 ‘정치적조직’ 즉 정치체제가 반인간적 이어서 국민이 심각하게 고통받는 나라다. 사이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변질된 스탈린주의, 그리고 세습독재권력의 무서운 탄압이 국민을 노예처럼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오늘날 북한을 세계최빈국이 되게 했으며, 변질된 스탈린주의는 모든국민이 감시의 눈을 피할수 없는 ‘병영국가’ 를 만들었다. 세습된 독재자 김정일은 신(神)이 되어 비밀경찰-폭력-강제수용소로 국가를 공포 정치로 운용하고 있다. 핵(核)이 김정일의 대외적인 보호장치라면 비밀경찰-폭력-공포정치는 대내용 안전장치인 것이다. 100만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해도, 국민의 3분의 1이 굶주리고 있어도 김정일이 건재한것은 그에게 ‘정치적인 힘-폭력’ 이 있기 때문이다. 쿠르드족은 정치가 없어서, 북한은 무서운 독재-공포정치 때문에 그 국민들이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보살피고 주재하는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국가를 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것이 다스릴수 있는 힘이다. 그게 권력(權力) 이다. 정치는 그래서, 그 권력을 합법적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정치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 하도록 하는 힘이며 기술이다. 다른말로 그게 정책(政策)이다. 나아가 정치와 그 힘인 권력은, 사회안에 존재하는 각종 ‘차이-서로다름’을 조정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분열을 막고 공존(共存)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정치는, 사회의 ‘질서’ 를 바로잡는 기능이다. 줄을서지 못하면, 차례가 지켜지지 않으면 ‘약육강식’ 의 원시사회가 된다. 그래서 정치는 ‘새치기’ 를 척결하는 기능이며 힘이다. 여기까지만 살펴봐도 우리모두는 한시라도 ‘정치’ 없이 생활할 수가 없다. 정치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좋은정치, 나쁜정치는 사람이 정치를 그렇게 만든 결과일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국가사회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다. 우리라고 예외일수는 없다. 이미 우리의 경제는 세계10위권 안팎을 오르내리는 ‘경제대국’으로 분류된다. 지금이 어렵다고 해도 단 두세대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지금 우리들은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보리고개’ 가 엊그제 였는데, 10월말 기준, 쌀재고량이 82만톤이 될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해에만 평년작을 웃도는 465만톤이 생산될 것이다. 겉으로 볼때,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거의 진입해 있다. 하드웨어에서는 단연 그렇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즉 그 속내는 텅빈채 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법질서의 문란은 후진국 수준이다. 불법, 편법이 판을 치는 무질서의 사회다. 세계최고수준의 IT 제품은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예절-문화가 크게 부족하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회다. 밖에서 들어온 모든 종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하나같이 미신화 되었다. 우리의 전통종교가 샤머니즘이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전문지인 ‘포린폴리스’ (FP) 15일자는, ‘최근 한국은 의회(국회)난투극 분야에서 세계최고’ 라고 하면서 ‘한국민주주의는 종합격투기를 통해 이루어 진다’ 고 비아냥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피를 봐야하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 로 매도하고 있다. 그게 어떤 나라든,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곧 국회다. 정치 1번지는 언제나 국회다. 그 국회가 세계최고의 폭력과 난투극이 횡행하는 곳이라면 한국정치는 죽었다는 얘기다. 지금 우리사회의 각종 본질적인 혼란은 ‘친북좌파’ 10년집권의 ‘정치적 후유증’ 이다. 정치는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게 누구든 국민은 그 정치의 후폭풍을 피해 갈수가 없다. 투표에 불참하는 소극적 기피행위 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는 공기처럼 밀접해 있고, 세끼의 밥처럼 일상적이다. 피해갈수 있는 방법이 없다.
21세기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정치’의 의미는 어떤것이며 그 정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종합격투기’ 가 된 한국정치판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그 하나가 극단적인 대립니다. 토론문화의 전통이 없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변절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선비정신이 합쳐져 타협없는 대치로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 ‘선명성’ 을 드러내 보이려는 강경일변도의 독선이 대화와 타협을 가로막는 덫이 되고있다. 다른 하나는, 이미 용도폐기된, 다 낡아빠진 ‘이념의 대립’ 이다. 이 갈등은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89년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91년의 소련해체는 동구라는 불럭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런데 그게 엉뚱하게도 한국땅에서 유령처럼 솟아올라 ‘이념갈등’ 이라는 때지난 전쟁을 치르고 있는중이다. 이 무의미한 소모전이 국력을 갉아먹고 있는 소리가 얼마나 큰것인지 들을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정치판은, 논리(論理)보다는 감정(感情)아 앞선다. 이는 민족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격렬하게 싸우는게 그런것이다.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면, 토론이 안되고, 사안을 검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고함과 주먹이 오가는 것이다. 똑같이, 총론(總論)에는 강하고 각론(各論)에는 약하다. 선거철이면 난무하는, 말도 안되는 구호들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총론적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 이 되는 악순환이 그렇게 오래동안 계속 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게 그 때문이다.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살고있지 않는가. 국회의원이 국회도서관에 들어앉아 법안을 연구하는 풍토가 생기지 않는한 풀기 어려운 숙제다. 정치가 땅에 발을 붙여야 개선의 여지도 생긴다. 지금의 풍선정치는 그대로 가면 실종될수밖에 없다.
지역구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은, 말하자면 자기 선거구민들-유권자들을 대표하는 대의원(代議員)이다. 선거구민의 정치적인 입장과 희망을 대표하는 독립적, 정치적 존재인 것이다. 그 국회의원이, 당론(党論) 때문에 독립성을 훼손 당하는게 지금의 국회다. 그 당론을 밀어붙이기 위해 격돌하고 지역구민들의 대표인 국회의원은 한낱 당의 졸(卒)이 되고만다. 당론과 공천이 한국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큰 덫임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지난 8월 28일, 민주당이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의 사진을 회의장 벽면에 거는 행사를 가졌다.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다. 유훈정치를 하겠다는 속내다. 벽마다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을 거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정치의 발전은, 언제나 건전하고 건강한 야당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민주당이 변해야 하는것이다. 반드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민주당, 야당이 돼야한다.
우선, 김대중, 노무현과 결별해야 한다. ‘집권10년’ 의 덫에 걸리지 말아야 새것이 나올수 있다. 다음은, 집권여당과 확실하게 차별되는 ‘정책’을 발굴해 내 놔야 한다. 그래서 민주당은 공부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문을 활짝열고, ‘다른 사람들’ 도 받아 들여야 한다. 다른생각, 다른 아이디어, 다른정책은 다른사람들에 의해 창출될수 있다. 지금의 ‘게토’ 같은 민주당, 특정지역만 대표하는 민주당 으로서는 앞날이 없다. 이제는 어떤일이 있어도 의사당을 떠나 거리로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건 정치의 포기다. 민주당은 시민단체가 아니다. 지역구에 뿌리를 두고있는 ‘정치정당’ 이다. 다수결과 그 결과에 승복하는 성숙한 자세도 보여줘야 한다. 좋은야당없이 좋은여당없고, 좋은여당없이 좋은나라없다. 정치는 그겋게 중요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1번지. 그 국회는 ‘폭력과 야만성’에서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폐단은 ‘준법정신’ 이 없는것과 그 결과인 ‘무질서’ 이다. 법을 만드는 입법부, 국회에서 시작된 불법이 전체사회에 퍼졌기 때문이다. ‘법질서’ 없이 선진국은 불가능하다. 그건 충분조건이 아니라 절대조건이다. 그래서 지금의 국회, 정치판은 나라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며, 우리의 발목을 잡고있는 거침돌이다. 누가 이 막가판 국회를 바로잡을 것인가. 그들에게 ‘자정능력’ 이 없음은 이미 충분히 증명됐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유권자들의 몫이다. 강기갑과 경남 사천선거구는 그 조합이 크게 잘못된 대표적인 케이스다. 유권자-국민이 정신을 차리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국민-유권자의 수준이 곧 정치의 수준이 아니겠는가. 신중한 선택과 적극적인 투표, 해답은 그 안에 있다. 이제는 단연코 우리가 그들을 바꿔야 한다. 그게 유일한 해법이다. |
어떤사람이 산을 내려가다 길을 잃었다. 여기저기 헤매던중 산을 올라오는 스님 한분을 만났다. ‘스님, 제가 내려가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어느쪽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의 대답은 짧았다. ‘물을따라 내려가게.’ 法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문글자가 가지는 깊은뜻을 깨달을수 있다. 사람이 한문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法자는, 삼수변(三水邊)에 갈거(去)가 조합된 글자다. 물을따라 가는게 ‘법’ 이라는 뜻이다. 생각할수록 오묘한 이치가 그 안에 있다. 물의 흐름을 따라가는것, 그 순리(順理)의 이치(理治)가 곧 법이며 법의 힘은 그 순리의 이치안에 있다.
물은 높은곳에서 낮은곳으로 흐르며 종당에는 그 목표인 바다에 이른다. 이 속성은 변하는법이 없다. 그 어떤것 으로도 물의 흐름은 막지못한다. 깊은곳은 고였다 가고, 막히면 돌아간다. 그리고 물은 언제나 모든사람들의 것이며 물은 우리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물을 따라가는것이 곧 法이라는 이 이치는 그래서 절묘하기까지 하다. 法의 일차적 의미는,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적 규범이며 국가 및 공공기관이 제정한 법률이나 명령, 규칙, 조례등을 아우르는 말이다. 정서적 으로는 인간의 도리와 이치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공동체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질서를 지켜야 평화롭게 살수있다. 이때의 질서는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약속’ 이며 그 이름이 ‘법’ 이다. 이 약속의 이행에는 국가의 강제력인 공권력이 동원되며 약속-법을 어긴 사람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제재를 가하게 된다. 고대사회에서는 통치자가 곧 판관(判官)인 이유가 그때문이었다. 솔로몬왕의 유명한 재판이야기도 그 증거의 하나다.
모두가 아는대로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다. 그리고 법치의 중심에 ‘헌법’ 이 있다. 본래 법치주의(法治主義)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전제아래 덕치(德治) 사상을 배제하고 법률에 의해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이며, 권력자의 자의(恣意)를 배제하고 국가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근대 입헌국가(立憲國家)의 정치원리 이기도 하다. 따라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 헌법은 근본이 되는 법규이며, 국가 통치체계의 기본적 조건과 국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등을 규정하는 근본법 이기도 하다. 국가의 주체, 객체, 기관, 작용등의 대원칙을 정한 기초법이며 다른 법률이나 명령으로 변경할수 없는 최고법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헌법의 조규(條規)에 기초를 두고 설치된 국가기관으로는 대통령, 국무위원, 국회, 법원등이 헌법기관이다.
여섯가지 기본이 되는 법률을 육법(六法) 이라고 한다. 헌법, 형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이 그것이다. 육법의 유형과 내용은, 인간의 사회공동체가 부딪히는 핵심적인 ‘관계’ 가 어떤것인지를 말해준다. 온갖 시시비비와 분쟁,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한 방편이 곧 육법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 안에는 소위 법조계(法曹界)라는것이 있다. 재판관, 검찰관, 변호사등 법률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그렇게 부른다. 분명한것은 그 세계가 고도의 전문화된 사회이며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않은 계층사회라는 점이다. 재판관과 검찰관이 아닌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접촉이 쉽게 이루어 지는데 이는 재판절차와 재판내용, 판결을 유리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검사(檢事)는, 범죄의 수사, 공소(公訴)의 제기, 공판절차의 추구, 형(刑)집행의 감독등을 행하는 사법행정관 으로서 검찰관 이기도 하다. 공소는 검사가 법원에 특정 형사사건의 재판을 청구하는 일로서 국가가 원고가 되어 형사범을 고소하는 것이다. 재판관(裁判官)은, 법원에 소속하여 재판사무를 담당하며 재판권을 실행하는 국가공무원이다.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헌법, 법률에만 구속되며 양심에 따라 직권을 행사한다. 이들 판사(判事)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이며 고등법원, 지방법원, 가정법원에 배속된다. 한편 법관은, 법원을 구성하고 대법원, 또는 각급법원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공무원이며 임기는 10년, 대법관과 대법원장은 임기가 6년이다. 일반적으로 재판소라 불리는 ‘법원’ 은 국가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서 구체적 사건에 대해 법률적 판단을 하는 권한을 가진다.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가정법원이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재판, 판단은, 신이아닌 이상 오류가 있을수 있다. 오심(誤審), 오판(誤判)이 그것이다. 사형을 언도, 형이 집행된뒤 진범이 잡힌경우도 있었다. 그 판결을 내렸던 판사는 옷을벗고 출가, 스님이 되었다. 재판에서 삼심제(三審制)가 도입된게 그 때문이다. 삼심제는 재판의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한 사건에 대해 세번재판을 받을수 있는 제도다. 상소(上訴)는, 하급법원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상급법원에 재심을 요구하는 일이며, 상고(上告)는 제2심 판결에 대한 상소다. 법원, 법관, 재판은, 원고와 피고가 분명해진 상태에서의 법집행 절차다. 같은 법률의 집행이라 해도 고소나 기소(공소)가 이루어진 이후의 법절차인 것이다. 따라서 법관은 그 이전의 ‘현장상황’ 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위치에 있는게 사실 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도 하다.
같은 법률이라 해도, 법원이 아닌 현장-사회에서의 법집행은 구체적인 공권력의 실력행사로 집행된다. 이때의 공권력(公權力)은 글자 그대로 사사로운 개인의 폭력이 아니라 정당한 국가의 법집행 실력인 것이다. 최일선의 현장에서 공권력을 집행하는 국가조직이 ‘경찰’ 이다. 법정에 앉아있는 법관의 현장과, 불법폭력시위대와 맞서있는 경찰의 현장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법집행의 최일선에서 국가의 법을 집행하는 경찰에게 있어 그 힘은 국가-법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공무집행(公務執行) 이라고 부른다. 이때 그 국가공권력에 대해 폭력을 가하고, 사법경찰관을 폭행 부상케 한다면 이는 중차대한 반국가적 범죄가 된다. 법-약속이 무너지면 ‘약육강식’ 의 원시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당한 힘, 공권력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공권력은 강물의 범람을 막는 둑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2008년 5월부터 2009년 8월까지,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법에서 재판받은 ‘불법폭력시위대’ 의 절반정도가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執行猶預)로 풀려났다. 집행유예는, 범죄자에게 단기(短期)의 징역, 또는 금고형을 선고할 때 정상에 따라 일정기간 그 형(刑) 의 집행을 미루는 것이다. 이들은 불법폭력시위에서, 스프레이 파스에 불을붙여 경찰에게 쐈으며, 염산병을 만들어 경찰을 향해 던졌고, 철제 삼단봉으로 경찰관의 머리를 내려치기까지 했다. 망치와 밧줄, 칼을 들고 다니면서 경찰버스를 훼손한 자들도 있으며, 특정건물에 쓰레기를 투척하며 난동을 부린 사악한 인가도 있다. 이런 부류들은 가장 분명한 반사회적 세력들이다. 온갖 불법폭력시위가 있는곳에 그 얼굴을 내밀고 있는 ‘직업시위꾼들’ 도 많다. 1심에서의 실형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다면 누가 이들 범죄자들을 응징할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짐승을 그 우리에서 풀어주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검찰은 즉각, ‘법원이 공권력에 큰 피해를 가한 범죄에 온정적인 태도로 대하기 때문에 불법폭력시위를 벌여도 무거운 처벌을 받지않는다는 일종의 학습효과가 생긴다‘고 비판했다. ‘경찰이 폭력시위가담자들을 상대할 때 무방비 상태에 빠져 고립될때가 있다. 그때 공권력-경찰을 지켜주는 힘은, 법을 공격할 경우, 공권력-경찰을 공격할 경우 엄벌에 처해진다는 시위가담자 들의 인식이다.‘ 즉 나라의 법만이 공권력을 지킬수 있다는 일선 경찰서 수사과장의 얘기다. 재향경우회는, 일간지에 실린 광고를 통해 사법에 묻고있다. ‘판사들이 경찰과 시위꾼이 충돌하는 불법폭력시위현장을 한번이라도 경험 했다면 그런 판결(집행유예)을 할수 있겠는가.‘
옛날의 법조인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젊은 판,검사도 ‘영감님’ 으로 불릴때다. 그때는 그들이 보통사람들 보다 교육도 많이 받았고 아는것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그 반대다. 정보화 시대에서 이미 지식은 보편화됐다. 오히려 그들의 ‘법적전문성’ 은 편협과 배타적인 고립으로 가고있다. ‘고시원-高試院’ 이란 단어가 그 키워드다. 외부와 차단된, 그 비좁고 음습한 공간에서 고시준비를 위해 장기간 칩거하는 사이 ‘세상물정’ 을 모르는 단선형 인간이 되는것이다. 본래 고등고시는 일제의 잔재로, 행정고급공무원, 법관, 검사, 변호사, 외교관등의 임용자격에 관해 국가가 시행한 시험이다. 그것이 1963년 5월9일자로 공포된 ‘사법시험령’ 에의해 ‘사법시험’ 으로 대치, 존속되었다. 이 시험은 1.2.3차로 구분해서 시행되며 시험과목은, 헌법,민법,형법,상법,행정법,민사소송법,형사소송법이다. 이 방대한분량의 범률공부를 하는 기나긴시간, 신문한장 제대로 읽을수도 없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외골수 인간이 나올수밖에 없는 물리적 환경이다. 그 좁은 인간적폭으로 ‘온정주의’ 일변도로 나갈 때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병들고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게 어떻게 보통일인가.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이제 국민들을 향해 대답을 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권위주의적인 판결의 독점과 횡포를 막기위해 ‘배심원제도’ 의 도입을 생각할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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