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2003 카테고리
이전블로그
이글루링크
최근 등록된 덧글
좋은글 남겨주셔서 감사..
by 2003 at 12/13 글을 참 명료하게 잘 적.. by 홍정인 at 12/12 난청치료를 검색했다가 .. by Uu at 06/14 www.msge.co.kr/ .. by 행복하세요 at 04/04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by eori at 02/02 부족한 글을 진지한 마.. by 2003 at 01/17 먼저, 본 사이트에서 좋.. by 둔마사과농장 at 01/05 http://cafe.daum.net.. by 43434 at 09/16 좋은 말씀 by 서영배 at 08/06 마지막 공간... 좋은정.. by 완도 서경낚시 at 08/03 최근 등록된 트랙백
DiyQ 종목발굴/주가예측
by 다이 [창조론 VS 진화론] .. by 진리의 길 확보를-으로 이어질 블.. by blogring.org 환경운동연합 공금횡령 .. by Save the Earth! Fire B.. dd by 내맘대로..... 게임 .. 지금 헌법 공부중인데 by Casa Verde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by i633 이상의 날개와 염상섭의.. by i633 오해가 있으시군요 by 앤디의 인도네시아 이야기 이슬람에 대한 오해 by alcoholiday..is this.. |
이영덕씨(54세)는, 대성학력개발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입 입시전문가’ 다. 본래 부산대 사범대학을 졸업한후 중학교에서 ‘도덕’ 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러다 대학원에 가기위해 서울에 올라왔고, 학비를 벌기위해 대성학원 학력개발연구소에 들어가게 된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놨다. 입사첫날, 그가 한 일은 지난학년도의 전국대학(커트라인) 배치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25년동안 다른일 안하고 배치표만 만들다보니 전문가가 될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전국에서 1년동안 150회 넘게 입시설명회에 참석하고 있다. 그의 수첩에는 2013학년도 대학수능시험일인 11월 8월 이후의 그케쥴로 꽉 차있다. 1986년 대성학원에 입사, 대한민국의 ‘족집게 입시분석가’가 된 것이다. 이영덕이 그려내는 ‘대학배치기준표’는 수험가에서는 ‘바이블’ 로 통한다. 그 배치기준표는 수만장이 인쇄되어 전국 고등학교에 배달될 정도다. ‘대성학원 전국수험생이 매해 9000여명이고, 한해 1500여명이 서울대, 연대, 고대에 합격한다. 때문에 누구보다도 대학의 커트라인을 정확히 알수있다.’ 이영덕의 설명이다.
-학력고사나 수능초창기에는 제도가 단순해서 잣대를 들이대기가 쉬웠다. 지금은 전형이 너무 복잡하다. 200여개의 4년제 대학이 저마다 실시하는 전형을 다 합치면 3.298가지가 된다. 이게 말이 되는것인가. 상담하다보면 숨이 꽉꽉 막힌다. -전국 65만명 수험생이 아침 8시10분까지 고사장에 입실해 죽을힘을 다해 수능을 치러야하고, 수능잘못볼것에 대비, 또 죽어라 논술공부를 해야 하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애 하나 대학에 보내보면 우리 입시제도가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이영덕의 이 얘기는 체험이 묻어있는 호소력이 있다. 그리고 그는 자녀의 대입을 준비하는 부모들에 대해 충고도 잊지않고 있다. 그 충고들 역시 25년동안 입시전쟁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터득한, 진솔한 얘기들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83%까지 치솟았던 진학률이 2011년 기준, 72%로 떨어진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수많은 가정들이 ‘입시전쟁’ 을 준비하고 있다. 이영덕의 충고-처방은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절실하다. 정말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다.
1. 빈번히 바뀌는 입시제도.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유행이 바뀌는것과 같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또 바꾼다. 그게 이미 50여회다. 입시제도가 계속 바뀐다는것은 학생과 학부모의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예측’ 을 막고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예를들어 한번정한 입시제도가 10년이나 15년정도만 지속된다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소될수있다. 지금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엄마가 7년뒤의 대학입시를 ‘예상’ 할수 있다면 엉뚱한 공부는 안 시켜도 된다는 얘기다. 불투명하기 때문에, 예측할수 없기 때문에 ‘중점준비’ 보다는 ‘전방위준비’ 를 할수밖에 없고 그만큼 엄청난 시간과 돈이 낭비되는것이다. 애들은 애들대로 받아야 할 교육은 못받고 ‘입시기술’ 을 배우느라 지친다. 입시제도는 하나의 '원칙‘ 이다. 그게 자꾸 바뀌면 우리가 가지고있는 ‘기본’ 이 흔들리는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입시제도의 유행처럼 바뀌는 악순환을 끊을때가 됐다. 그래야 개천에서 용이 나올수 있다.
2. 대입을 위한 기본적인 대처. 어차피 기본적인 흐름은 같은것이다. 국어, 수학, 영어에 대한 기본을 아주 탄탄하게 다져놔야 한다. 사실 그 기본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초등학교때 ‘스펙’ 쌓겠다는것, 그건 바보짓이다. 입시사정관제에 대한 대비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게 ‘독서’ 다. 논술이 중요해서 독서가 중요하게 아니다. 책 좋아하는 애가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독서는 ‘이해력과 사고력’ 을 키우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이제스트는 절대 안된다. 요지음 대학들은 그 책을 원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때 대답할수 있는 질문을 낸다. 앞으로는 영어듣기 평가의 비중이 계속 높아질 것이다. 많이 읽으면 깊이가 생기고 실력이 쌓인다. 그래서 독서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중요하다.
3. 전공의 중요성. 예를들어 어떤 학생이 서울의대에 가려고 하는데 점수가 안된다. 이때의 정석은 연세대 의대로 낮추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의 지망이 ‘의사’ 였기 때문이다. 서울대를 나오나 연세대를 나오나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의사’ 가 되는것이다. 그런데도 서울의대에 갈수없다면 전혀 그 분야가 다른 서울공대 전자공학과로 지원한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의예과와 전자공학과는 전혀 어떤 연계도 없다. 자기전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출발부터 차질이 생기는게 그 때문이다. 5월이면 재수종합반으로 달려오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어릴때부터 자녀와 함께 ‘직업’ 을 탐색해야 한다. 가고싶은 학과의 교수에게 전화해서 조언을 얻고싶다고 하면 대학정문까지 맨발로 뛰어나올것이다. 노력은 그런데에 쏟는것이다. ‘진로’ 를 결정하는게 언제나 먼저이며 계속 그것을 목표로 나가야 성공할수있다.
4. 재수문제. 재수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다는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안 하는게 좋다. 단, 올해 수능시험을 망친이유가 분명하면 해도좋다. 다른 하나는 모의고사 성적은 꾸준히 잘 나왔는데 수능에서만 실패했다면 다시 도전해 볼만하다. 재수한다는것은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고통받는 일이다. 심리적 으로나 물질적으로도 그렇다. 따라서 위의 두가지 이유가 분명할때만 재수하는게 좋다. 객관적 이유가 분명하지 않을때, 오직 본인의 욕심만 앞세울때, 또는 도피적인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재수는 안 하는게 낫다. 가혹한 현실이지만 기업이 선호하는 ‘일류대’ 에 갈수없는 성적이라면 ‘백수’ 가 되는것보다는 자기가 좋아하고 잘할수 있는길을 택하는게 현명하다. 성공의 확률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백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조건만 쌓인다. 처음의 선택이 잘못 되었었기 때문이다.
5. 첫째조건. 아무리 정보가 뛰어난 엄마라 해도 자식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또하나, 초등학교때부터 입시준비하는 경우가 있는데 관심은 좋으나 쓸데없는 짓이다. 수능에서 영어시험이 점점 쉬워지는데 겨울방학때 토익, 토풀점수 올린다고 애들을 학원돌리는 엄마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아이의 천부, 적성, 성적, 진학가능학과를 종합적으로 살피면서 거기에 필요한 공부를 해야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서면 아이의 자세가 달라진다. 엄마의 4분의 1 정도의 노력만 으로도 효과는 엄청나다. 아버지는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의 진로에대해 큰 그림을 그릴수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해도 본인의 노력이 첫째다. 말을 강가에까지 끌고갈수는 있어도 물을 먹이지는 못한다.
이상은 이영덕씨의 충고들을 풀어서 얘기해본 내용들이다. 하나하나가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얘기임을 알수있다. 근자 ‘대학입시’ 에서도 작지만 음미해 볼만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83%까지 치솟았던 진학률이 72%로 떨어진것이 가장 큰 변화다. 1-2%가 아닌 10%이기에 더 그렇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요인들이 있을것이며 현명한 학부모라면 그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대비해야 한다. 100만이 넘는 백수는 크게 켜져있는 경고등이다. 눈설미가 있는 지혜로운 학생이라면 그 의미를 알아차릴것이다. 은행이 창구직원을 고졸여상졸업생으로 채용하기 시작한것을 필두로 각 대기업과 공기업들이 고졸사원 채용을 다시 시작했다. 상당히 의미있는 변화라고 볼수있다. 다른 한가지는, 장수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부모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자식에게 올인하다 보면 ‘자기것’ 은 하나도 남지않는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8년 조사에서는, 노부모를 부양하겠다는 ‘부모봉양지지율’ 이 89.9%였다. 이것이 2010년에는 36%로 급락했다. 아마 앞으로는 계속 떨어져 나중에는 제로가 될 확률이 높다. ‘백수’ 때문에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해 졌다는 얘기다. 오늘도 모자라는 자녀의 사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로 나선 엄마들이 부지기수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된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이렇게 사는것이 내 인생인가.’ 자녀의 교육은 우리가 살고있는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거기에 목을매고 다른것들을 희생한다는것은 어리석은 쏠림현상의 하나일수 있다. 부모도, 자녀도, 모두가 한 인간-개인으로서의 자기길과 삶이 있는법이다. 순리에 따라 그 길을 가는게 인생이 아닐까. 우리모두가 깊이 생각해볼 숙제가 아닐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성취는 또다른 성취를 낳는다.-P. 드래커. 년전, 늦가을의 어느날, 나는 이미 잘 알려진 어떤 달동네에 일 때문에 간 일이 있었다. 그곳 골목에 들어섰을때 초등학교 3,4학년정도의 남자아이 넷이 길옆 좌판에 올라앉아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었다. 가까이가서 들여다보니 각자 무릎앞에 동전들을 쌓아놓고 익숙한 솜씨로 화토를 하고있었다. 말하자면 대낮에 어린애들이 도박을 하고있는 것이다. 나는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봤다. -정말 화토를 잘 치는구나, 그런데 누구한테 화토치는걸 배운거냐. 네 개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대답이 나왔다. -엄마, 아빠한테서요.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보고 들은대로 따라한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백지’ 같은 상태다. 거기에 첫 그림이 화토라면, 그 바탕그림은 평생 그들을 지배하게된다. 나중에 수많은 덧그림이 쌓인다 해도 바탕그림은 변하지않고 그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다. 저학년 학생들에 대한 기초교육은 그래서 더 중요해진다.
그 평생을 교육기관에서 일한 신부님 한분이 이런말을 했다. ‘7살까지만 우리에게 맡겨달라, 그 후엔 누가 기르든 상관없다.‘ 정말 많은 의미를 함축한 확신이며 체험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기도 하다. 바탕그림-기초교육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노르웨이의 심리학자인 댄 올베우스 박사는 학생의 성장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20년간의 장기추적 방식을 택했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때 폭력으로 다른 학생을 가해한 경험이 있는 학생중 69%가 24세 이전에 전과1범이 되었으며, 35-40%는 전과 3범이 되었다. 바탕그림이 그들을 사로잡았다는 얘기다. 7살 이전에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가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된다는 반증으로 볼수있는 객관적 연구결과 이기도 하다. 바탕그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덧그림으로 덮었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서운것이다.
지난달 대구에서 폭력과 왕따에 견디지못한 중학생이 자살하자, 이 문제에 대한 온갖 반응이 봇물이 터진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언론의 행차뒤 나팔은 도가 지나쳤을 정도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표현은 ‘올것이 왔다’ 다. 학교폭력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모두가 눈을감고, 귀를 막고 외면했던게 사실이다. 내 아이가 직접 당하지 않는한 모두가 ‘오불관’ 이었다. 그동안 학교폭력은 자리를 넓혀갔고, 방법이 잔인해 졌으며, 가담자가 늘어났다. 2010년 년말을 기준할 때, 년간 청소년 자살자는 353명이다. 나누어보면 하루에 한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안에 ‘학교폭력’ 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년간의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청소년 자살자가 더 많다는것은 아주 커다란 국가적 적신호가 아닐수 없다. 소홀히 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지불하는 대가가 엄청난게 청소년문제다. 이는 어느나라나 마찬가지다.
지금 학교폭력에서 심각한 문제는 그게 ‘일상적’ 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일이든 일상적이 되면 그 심각성이 반감된다. 그래서 폭력이 진화하는 것이다. 폭력의 일상성은 청소년들이 장시간, 간섭없이,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여러 가지 폭력앞에 노출되었다는 얘기다. 그 하나가 지나치게 미화된 ‘조폭영화’ 다. 두목은 성공한,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다음이 차마 할께볼수없는 텔레비전의 막장 드라마들이다. 폭력이 어떤 제한이나 여과장치없이 영상으로 전파될때, 청소년들이 이를 흡수, 모방하는 정도는 우리들의 상식을 넘는수준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폭력과 쌍소리가 일반화 되어있는 막가파세상이다. 영상문화를 검열하는 기관은 있지만 상업주의의 막강한 힘에 비해 보잘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직업시위꾼들에게 공권력-경찰이 공격받고 있는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무법천지가 더 따로 있겠는가.
‘메이플스토리’ 는 게임업체 넥슨이 서비스하는 인터넷 게임이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스스로 가상 인물이 되어 괴물을 무찌르는 전사가 된다. 거대한 괴물 ‘자쿰’을 무찌르기 위해 반복적으로 공격해야 하며 여럿이 떼를 지어 한 마리의 자쿰을 공격하기도 한다. 특히 이 게임에서는 여러명의 이용자가 레벨(게임안에서의 차별적 계급) 을 높이는 경쟁을 하게되는데 그때 패자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잔인하고 혹독하다. 13살의 한 초등학교 학생은, ‘이 세상에서 게임레벨이 높은 친구들이 가장 부럽다’ 고 할정도다.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동급생을 괴물인 ‘자쿰’ 으로 취급,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공격을 가한다. 인터넷상의 가상현실-사이버공간과 실제의 현실을 구분못하는 중독현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부산에서는 게임중독을 나무라는 어머니를 살해한 중학생이 있었다. 게임중독, 이 현상은 어른들이 손을 놓고있는동안 무서운 상업주의가 청소년들의 세계를 완전히 점령한 사례라고 할수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은, 19-39세까지 인터넷 이용인구 21.91만8000여명중, 174만 3000여명이 인터넷에 중독돼있으며, 청소년 인구는 이중 50.3%인 87만 7000여명에 이를것으로 추산했다. 특히 인터넷중독의 청소년 대부분은 ‘게임중독’ 이었다. 인터넷중독 청소년중 65.2%인 57만여명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주요목적이 ‘게임’ 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게임시장의 수치를 살펴봄으로서 청소년들을 ‘죽이고 있는’ 게임의 중독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서울공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인 김정주는 1994년 게임업체 ‘넥슨’ 을 창업하고, 세계최초의 그래픽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 를 출시했다. 이후 ‘메이플스토리, 비앤비, 던전앤 파이터’ 등 온라인 게임이 전세게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창업자가 당대에 큰돈을 벌게됐다. 2011년 매출 1조2600억원에 영업이익 5500억원을 기록했으며 이중 해외비중이 64%다. (국내게임업체들의 2010년매출은 총 7조8000억원이다.) 지난 1월1일 금융감독원과 재벌닷컴에 따르면, 넥슨재팬이 상장되면서 게임업체 ‘넥슨’의 지분평가는 2조94억원으로 증가했다. 매출, 영업이익, 지분평가에서 웬만한 재벌기업에 육박하는 규모다. 실로 어마어마한 시장인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IT 잡지 ‘와이어드’ 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은 21세기 최고의 기업으로 미국검색업체 ‘구글’ 과 한국의 온라인 게임업체 ‘넥슨’을 꼽았다. 그는 넥슨을, 무료로 상품(게임)을 나눠주고 충성고객일부가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도록 만드는 21세기형 ‘프리미엄’ 사업모델을 세계최초로 만든기업 이라고 했다. 여기서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충성고객’ 이 바로 청소년 게임중독자들인 것이다. 지분평가 2조원은, 사실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다. 그 돈의 대부분이 중독청소년들에 의한것 이라면 넥슨은 게임중독자들을 숙주로 기생하는 무서운 해충인 것이다. 본래 상업주의는 윤리, 도덕과는 무관하다. 오직 이윤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품이 소비자에게 가하는 해(害)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대표적인 악덕이 ‘불량식품’ 이다. 그건 사실상의 ‘간접살인’ 이지만 어떤 장사꾼이라 해도 적발되기 전까지는 눈하나 깜빡하지않는다. 입적하신 법정께서 일찍이 외친말씀이 ‘광고에 저항하라’ 였다. 지금 대한민국의 문화는 시청율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광고가, 그리고 광고뒤에는 무서운 상업주의가 있는게 현실이다.
왕따당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정도로 그 학생을 괴롭힌 가해학생들의 가장 큰 특징은 ‘죄의식’ 이 없다는 점이다. 폭력이 일상화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점이 가장 두렵고 무섭다.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그게 잘못임을 모른다면 일단은 ‘정신병자’ 로 봐야한다. 사이버세계와 현실을 구분못하는 중독증세가 나타내는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가지는 ‘죄의식’은, 태생적이기 보다는 후천적학습에 의해 교육된다. 공교육이 붕괴되면서 도덕, 윤리와 같은 인성교육이 입시도구과목에 밀려 도태된후, 사실상 청소년들은 ‘죄의식’ 에 대해 배울수가 없게됐다. 배우지 못하면 알수가 없고, 모르면 무슨일이든 저지를수 있는게 청소년들이다. ‘학원’ 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학원은 단지 ‘입시기술’ 을 주입하는 장사꾼들이기 때문이다. 공교육에 비해 사교육시장이 커졌다는것은 정상적인 교육을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참혹한 후유증은 지금보다는 미래에 더크게,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다.
한국교총이 지난해 12월 전국 초,중,고교교사 201명을 대상으로 최근 교사들의 명예퇴직이 급증하는 이유를 설문조사한바, 80.6%가 ‘학생인권조례제정’ 등으로 교권이 추락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서울에 있는 한 중학교 교사한분은, 체벌금지조례가 시작된 2010년무렵부터 학생생활지도가 더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교사가 교내에서 흡연하는 학생을 적발해도 입에 담배를 문채 ‘왜요’ 라며 쳐다보기가 일수라고 했다. 교실에서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면 대놓고 ‘씨팔’ 이라고 욕을하고, 책상을 걷어찬다고 했다. 말하자면, ‘선생님, 학생인권조례도 생겼으니 저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다. 조례를 주장하는 좌파교육감들도 사태가 이렇게 발전할줄은 몰랐을 것이다. 매사에 입이 백개나되던 ‘전교조’ 가 침묵하고 있는것은 비열하기까지 하다. 720만 초,중,고 학생의 4%인 30만명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끔찍한 숫자가 아닐수 없다. 학생들과 매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대하고 있는게 교사들이다. 그들에게 ‘교권회복’ 이라는 ‘힘’ 을 실어주지 않는한 이 심각한 문제는 수습할 길이없다. 교사 스스로의 ‘용기’ 가 필요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돈 씀씀이가 갑자기 커지고, 친구가 줬다고 하면서 비싼물건들을 가지고 다니고, 부모와의 대화를 기피하거나, 외출이 잦고 귀가시간이 불규칙하고 늦어지거나, 부모에게 반항하고 참을성이 줄어들고, 특히 말투가 거칠어지면 자기자식이 어떤 왕따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판단해야한다. 폭력학생의 상당수가 ‘문제가정’ 이나 ‘빈곤한가정’에서 배출되는게 사실이지만 폭력에 연루된 학생의 70%는 고소득 전문직 부로를 둔 가정의 학생들임도 알아야 한다. 어떤가정도 ‘안심’ 할 수가 없는게 현실이다. 왕따가 되는것도, 가해자가 되는것도 주변에서 모르는채 진행되는게 이 문제의 무서운 취약점이다. 그래서 눈에 불을켜고 살펴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무역고 1조달러의 경제대국이 됐다. 그러나 그 어떤 국가시스템이라 해도 그것을 운용하는건 인간-사람-국민이다. 왕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이 나타나고 있는것은 우리의 미래가 무너지고있는 소리다. 그 청소년들이 바로 ‘미래의 국민’ 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원인을 다스리고, 후진국은 결과에만 매 달린다.-yorowon. 이화여대 에코과학부의 최재천 교수는, ‘지식편집자’ 로 불리우는 분이다. 그는 ‘조용한 밤, 혼자 책상에 앉아 글쓰는 순간이 제일행복하다’ 고 했다. 한 사람의 직업이 행복으로 이어지는게 이런경우다. 학자가 되어 글을 쓴다는것은 행운이자 개인의 행복임에 틀림이없다. 한편, 정강찬 판사는 현재 수원지법 민사9부의 부장판사다. ‘다른 직장인들도 그렇겠지만 나의 하루일과도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래도 노래부르기는 멈출수 없다. 노래는 내 행복의 원천이자 삶을 즐기는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에서 독창회를 가지는 수준의 아마추어 성악가다. 자기의 직업과 무관한, 전혀 다른 분야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을 만들어 가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두사람 모두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으로 ‘가장 행복한시간’ 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그게 누구든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그것을 희구하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행복-幸福 은, 우리의 일상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수있다. 따라서 행복은 소유이기 보다는 ‘느낌’인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영역임을 알수있다. 육(肉)에 대해서는 ‘쾌락’ 이라는 말을쓰는게 그 때문이다. 행복과 달리 쾌락에는 긍정과 함께 부정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게 사실이다. 부패와 타락이 그런것들이다. 매일경제신문과 MBN 이 전국 7개 도시에 거주하는 19-59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결과 지난해 대한민국 행복지수는 5점기준 3.4점으로 백분위로 환산하면 68점이된다. 낙제점수는 면했지만 결코 좋은점수는 아니다. 응답자들은 경제불안, 부정부패만연, 양극화 현상이 행복을 저해하는 부정적 요소들 이라고 답했다. 행복을 느낀다는것은 그만큼 주위환경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모두는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행복은 주관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된다. 행복은 계량할수도 없으며 객관적 수치로 나타낼수도 없다. 따라서 서로다른 행복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며 그 차이들을 수용해야 된다. 다른 한가지는, 남녀노소, 연령, 학력, 직업등에 따라 그 추구하는 행복과 누리고 있는 행복은 다를수밖에 없다. 개인이 가지고있는 가치관이 연계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현역과 은퇴자의 차이다. 이 차이는 거의 결정적 이라고 할수있다. 나는 이미 은퇴후 노후생활이 10년이 넘었다. 나이도 칠십대 중반이니 완전한 노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참으로 놀라운사실은, 현역때보다 지금의 생활이 더 행복하다는 점이다. 그렇다 해도 나의 ‘행복론’ 도 역시 주관적인 것임은 말할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행복’ 에 대해 얘기하는것은 현역이든, 이미은퇴한 분이든 모두에게 참고는 될수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중한 정보의 교환’ 인 것이다. 나역시 다른분들의 ‘가장 행복한 시간’ 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듣고싶다. 그리고 배우고 싶다.
오래전에 시청했던 사극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동헌(東軒)에서 퇴청한 사또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사랑에서 책을 읽고있었다. 그때, 당돌한 아전의 어린아들이 사또에게 다가가서 질문을 한다. -원님, 지금 뭐 하세요. -보면 모르느냐, 책을 읽고있지 않느냐. -책속엔 뭐가 있는데요. -이속엔 모든게 다 들어 있단다. -밥도 있나요. -그럼, 밥도있지. -옷도 있나요. -물론 옷도 있단다. -그럼 집이나 벼슬도 있나요. 사또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한다. -얘야, 정말 책속에는 모든게 다 들어있단다. 그러니 너도 책을 읽어야 하느니라. ‘책속에 모든게 다 들어있다는’ 는 이 말은 지금도 ‘진리’ 다. 책은 부족한 인간을 ‘완성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인간은 더 우수해지고, 더 효율적이 되어 상대적으로 앞설수 있으며 그 삶이 풍요로워진다. ‘읽기’ 는 ‘깊이’ 를 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이읽는 사람은 당하지 못한다. 그만큼 뛰어난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것이 책이고,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것도 책이고, 노후생활에서 가장많이 구입하고있는 물건도 책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안락의자에 앉으면 왼쪽 바닥에는 언제나 10-20권의 신간서적이 쌓여있다. 내가 매일 읽는 책들이다.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던지 책한권은 가지고 다니며 잠깐의 짬이라도 생기면 책을 읽는다. 내게있어 책을 읽는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 이며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다. 책을 읽으면 지식-앎이 크게 쌓이고 그만큼의 ‘깨달음’ 을 얻게된다.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눈과 수준이 향상되며 동서고금의 일상들을 읽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수 있다. 책은 언제나 스승이자 친구이며 또 동반자 이기도 하다. 마음이 비타민, 아침편지의 고도원씨는, ‘읽기는 사색의 기본이다. 매일 물을마시고 밥을 먹지않으면 육체가 상하듯, 읽기를 멈추면 정신이 허물어진다.‘ 고 했다. 인간이 책을 읽지않으면 그 정신이 가난해지고 결국은 고사하는것이다. 말라죽은 나무의 모습이 그러하다. 책을 읽는시간, 그것은 사실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행복한 시간인 것이다.
음악을 ‘영혼이 거니는 뜰’ 이라고 한다. 육(肉)이 노는 마당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이성이 철학을 낳고, 인간의 고귀한 영혼이 종교를 추구한다면 인간의 정서, 그 놀라운 능력이 음악을 만들어 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운명’ 이라고 생각하며, 최고의 피아노협주곡은 베토벤의 5번 ‘황제’ 이며, 그리고 최고의 실내악은 베토벤의 피아노트리오 7번 ‘대공’ 이라고 평가한다. 이 기준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다. 베토벤 자신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곡들이기도 하다. 그는 17세때 모차르트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하이든의 제자였고 살리에르 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근자 한영란의 피아노, 김유미의 바이얼린, 나덕성의 첼로가 연주하는 ‘대공’을 듣고 깊이 매료된바 있다. 특히 한영란 교수의 피아노연주는 발군의 놀라운 실력이었다. 오늘도 KT 의 V.O.D. 를 통해 그들의 놀라운 연주를 다시 시청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자주 다시 시청할 것이다. 나는 음악과 무관하게 지나는 날은 하루도 없다. 어떤날은 종일 여러곡을 듣기도 한다. 음악을 감상할때마다 금관, 목관, 현악기를 배운사실에 대해 감사한다. 악기를 알고 듣는것과 모르고 듣는 음악은 같을수가 없다. 음악을 들을때의 행복감은 독서와는 조금 다르다. 내게있어 그것은 정말 놀라운 순간들이다. 음악을 듣기위해 가지고있는 책들도 상당히 많다. 공부하면서 듣기 때문이다. 중학생 이었을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집중해서 듣는 음악은 바하의 올갠곡들이다. 특히 맹인연주자인 헬무트 발하의 독보적인 연주를 좋아한다. 내게있어 음악은 언제나 기쁨의 원천이다.
‘악기는 인간을 다른사람이 되게한다’ 는 말이 있다. 악기가 내는 소리는 음악이며 음악은 선(善)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후 지금까지 악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악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칠순나이에 첼로를 시작한것도 그래서이다. 매일 악기를 연습하고 연주한다는것은 보통사람으로는 ‘특별한 경우’ 라고 할수있을것이다. 현악기는 어렵지만 나는 매일 즐거운마음으로 첼로를 연습한다. 내 삶의 질이 향상되는것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며 그 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기만큼 좋아하는게 ‘영화’ 다. 영화는 내게있어 상상력의 보고다. 사람이 상상력이 부족하면 목석처럼 딱딱해져서 매마른 삶을 살게된다. 나이들어 고갈될수있는 상상력을 영화가 메워주는 셈이다. 어제는 사이엔드필드 감독이 오래전에 만든영화 ‘줄로-Zulu' 의 리메이크판을 수십년만에 다시봤다. 19세기후반, 남아프리카 줄루왕국의 4000명의 전사와 100명의 영국군이 벌인 ‘독스드리프트’ 의 치열했던 전투를 그린 옛영화다. 오래된 영화에는 지금은 찾아볼수 없는 ‘순수함’ 이 있다. 내게있어 영화는 삶의 반경을 넓혀가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영화가 종합예술이기에 더 그렇다. 나이 들어서까지도 변함없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실에 대해 늘 감사하고 있다.
그게 누구든 글을쓴다는 것은, 대단한 정신작업이다. 글쓰기자체는 즐겁기 보다는 힘든 과정이며, 특히 디테일한 자료들을 찾고 확인하고 인용하는 일련의 작업은 사람을 지치게 할 정도다. 그런데도 글을 쓰는것은 그것이 대단히 비중이 큰 ‘창작활동’ 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편씩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글을쓰기위한 노력자체는 대단히 생산적인 삶의 한 부분이다. 자료를 찾고, plot를 세우고, 생각들을 숙성하는 시간이 지나면, 나는 언제나 종이에 볼펜으로 글을쓴다. 창의적인 생각은 손에의해 나타는것이며 손으로 하는 작업이 가장 창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은, 다 쓰고난 다음에야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낄수 있다. 자판을 두드려 글을 워드에 입력시킨후, 정밀한 수정과 교정작업을 하게된다. 대개의 경우 글 한편에 다섯 번 이상의 교정을 보고있다. 그리고 최종적인 원고가 작성되었을때, 나는 ‘학문하는 행복’ 에 깊이 빠진다. 과정은 어려웠지만 글 한편을 완성했을때의 기쁨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학문-공부하는 즐거움은 그렇게 큰 것이다.
참새, 까치, 산비들기, 까마귀, 백로, 그리고 커다란 철새인 큰 기러기, 오리들, 때로는 제비까지 내가 수로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나비, 논 메뚜기, 잠자리, 사마귀까지 나타난다. 어떤때는 전봇대위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맹금류를 볼때도 있다. 그리고 도라지를 심어놓은 밭을 지나면, 상치등 푸성귀밭이 나타나고 더 걸어가면 마늘밭, 논, 포도밭, 오이를 기르는 비닐하우스, 그 위로는 보리밭이 있다. 무와 배추밭이 나타나고 더 위로 걸어가면 아주 커다란 고추밭이 있다. 나는 네계절을 수로의 둑을 걸으면서 겪고있다. 그렇게 매일 자연속에서 걷기운동을 하고있다. 수십년째 계속하고 있는 ‘걷기’는 이제 하나의 철학적인 과정이 됐다. 오래걸으면, 모든 인간은 신중해 지고, 깊이가 생기며 겸손해 질수있다. 그러한 마음의 보상이 ‘건강’ 이다. 나는 일주일에 주일을 빼고는 매일 한시간씩 수로의 둑을 아주 빠른걸음으로 걷는다. 혼자서 수로를 걷는 그 시간은 사색과 명상의 시간이며 자연과 교감하는, 대단히 행복한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늘 감사하고 있다. 내 건강의 원천은 단연코 ‘걷기’ 라고 확신한다.
나의 경우, 지금의 행복한 시간들은 은퇴후에 갑자기, 새로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대부분 현역일때의 생활 패턴이 이어진 것들이라고 할수있다. 그것들이 더 많은 시간을 얻고 더 전문적인 것으로 발전했을 뿐이다. 은퇴후의 노후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료-無聊’ 다. 할 일이 없어 지루하고 심심한게 그것이다. 무료는 사람을 늙게하고 못쓰게 만든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시간’ 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악한것이 아니라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즐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하루 미루다 보면 코앞에 다가와 있는게 은퇴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중요한게 준비와 그 연속성이다. ‘가장 행복한시간’ 도 결국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일상에서 행복한시간이 많으면 그게바로 축복된 삶이 아니겠는가. 행복은 절대로 특별한게 아니다. 일상안에 숨어있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물일 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서둘러 준비할 일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 을 먼저 가져야 한다. 감사는 행복으로 들어서는 문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흘러가는것이 아니라 채워져 가는것이다.- 중국격언. 영어에 lead라는 단어가 있다. 안내하다, 앞서다, 통솔하고 지도하다 라는 뜻을가진 , 흔히쓰는 말이다. 운동경기 에서는 상대팀을 점수에서 앞서는것을 가리킬때도 쓴다. 여기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단어가 leader 다. 지도자 또는 선두-맨 앞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조직이나 단체등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철새인 기러기떼가 비행편대로 날아갈 때 제일앞장서는 기러기가 리더인 것이다. 다음에 파생된 단어가 leadership이다. 사람과 집단의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통솔력을 뜻한다. 따라서 지도(指導)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것이며 지도력은 그러한 능력과 기량을 의미한다. 지금의 세계에서 최고의 지도력-leadership은 말한것도 없이 국가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정치지도자를 의미한다. 국가원수-대통령이 거기에 해당되는것이다. 그만큼 대통령개인의 리더십-지도력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수 있을정도로 막강하고 중차대한 역량임에 틀림이 없다.
2011년말 현재, 전세계가 함께 안고있는 가장 큰 국제문제는 말할것도 없이 ‘유럽의 금융위기’ 다. 그 파장이 워낙크기 때문에 세계 여러나라의 증권시장이 널뛰기를 계속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같은통화-유로를 쓰고있는 EU국가들중 그리스를 필두로 이탈리아, 스페인이 국가부도 직전이거나 국가경제파탄을 눈앞에 두고있기 때문이며 이 금융위기가 같은 통화권인 다른나라들에 엄청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전 세계로 퍼지고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지만 해당국가의 필사적인 자구노력이 없는한 쉽게해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유럽 사람들의 건전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와는 달리 국가부도위기를 맞고있는 남유럽은 수입이 따르지못하는 방만한 지출-복지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그리스의 표퓰리즘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해 국가재정이 거덜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은것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사정도 별로 나을게 없다. 지금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일제히 독일을 쳐다보고 있다. 이 위기를 타개할수 있는 현실적인 힘-재정은 독일이 가장 튼튼하기 때문이다.
독일경제의 모든지표는 우량, 그 자체다. GDP 3조 306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4만 4729달러, 2010년에 3.6%, 2011년에 2.8% 성장, 이렇게 양호한 실적이면서도 물가상승은 1.1%. 정말 대단한 수치들이 아닐수 없다. 유로존의 어떤 국가도 따라갈수 없는 경제지표가 오늘의 독일이 얼마나 강력한 국가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유럽연합-EU 는,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로 출발했으며 ‘마스트리히트조약’ 으로 정치, 경제의 통합을 지향하는 27국의 연합체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목표자체가 현실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그 깊은 속내에는 역사적으로 가지고있는 ‘독일제국’ 에 대한 두려움도 있는게 사실이다. 1,2차대전을 치르면서 유럽은 독일을 묶어두지 않으면 결코 안심할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바 있다. 다시 ‘아우슈비츠’ 같은 악몽이 나타나지 않기위해 유럽은 독일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 독일이 이제는 ‘유럽금융위기’ 의 유일한 해결사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독일병정들’ 은 그렇게 무섭다.
유럽전체가 심각한 금융위기에 노출된 지금, 유독 독일만 건전한것은 왜 일까, 왜 독일경제는 그렇게 튼튼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서는 지금의 기민당출신의 메르켈 총리가 아니라, 1998년에서 2005년까지 재임했던 사민당의 슈뢰더총리로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그때, 독일도 연금적자와 각종보험적자가 해마다 100억 달러씩 누적되고 있었다. 그대로 가면 독일경제가 무너지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슈뢰더는 수술을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수도 있다는것을 알았고, 긴축재정정책이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힐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있었다. 슈뢰더의 ‘독일경제 재생계획’이 발표되었을때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2003년 10월, 베를린에 있는 집권 사민당 당사는 ‘우리의 연금에서 더러운 손을 당장 떼라’ 는 플레카드를 든 수천명의 성난 시위대에 포위됐다. 은퇴자협회의 대변인은 ‘오늘의 독일을 있게한것이 누구이며, 다음 세대가 유복하게 살수있도록 길을 깐것이 누군데... 배은망덕하기 짝이없다.’ 고 외쳤으며, 노조간부들은 ‘슈뢰더는 계급과 당의 배신자’ 라고 매도했다. 복지의 수혜자 모두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슈뢰더는, ‘은퇴자의 연금을 현재상태로 동결하겠다.’ 고 발표했다. 그 발표를 들은 국민들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했다. 어떤 불황이 와도 연금만은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독일정치의 금기를 깼기 때문이다. 아시아권과 달리 유럽의 연금제도는 일찍 발달했으며 연금수령액이 풍족하기 때문에 ‘연금생활’ 은 인생의 안락한 노후를 의미했다. 그 소중한 연금을 ‘동결’ 한다는것은 곧 ‘고통’ 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금에서 더러운 손을 떼라’ 는 구호가 그 절실함을 얘기하고 있다. 연금생활자도 ‘유권자-표’다. 그것을 알면서도 연금을 동결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거덜나는것을 슈뢰더는 알고 있었기에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노인양로보험의 개인부담을 2배로 인상한다’ 고 발표했다. 당사자들은 기가 막혔을것이다. 개인부담율 인상은, 뒤집어 말하면 국가재정의 지원을 그만큼 줄이겠다는 얘기이며 이는 국고가 바닥나 더 지원할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음이 ‘실업수당 지급기간을 32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한다’ 는 것이었다. 유럽쪽의 실업수당은 지급액수가 크기 때문에 거의 생활급수준이다. 그 지급을 20개월이나 단축한다는것은 ‘죽으라’ 는 얘기나 다를게 없었다. 실업자들의 분노가 한늘을 찌르는것은 당연했다. 이어, ‘건강보험대상의 축소’ 였다. 개인진료비에 대한 국가지원을 줄이겠다는 이 발표는 ‘민생문제의 핵심’ 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나아가 복지의 축소와 함께, 200억달러 규모의 세금감면계획을 발표하자 집권당 안에서도 ‘슈뢰더의 정치적 자살’ 이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재정긴축정책’ 이 발표된 직후 여론조사에서 슈뢰더의 지지율은 22%로 급락했다. ‘비인기종목’ 은 전부 들고 나섰으니 누가 그를 지지할수 있었겠는가. 그때의, 슈뢰더의 심정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는 단신으로 쓰나미같은 반대앞에 홀로 섰던것이다. 그리고 독일을 구해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일은, 그때 야당인 기민당의 당수이자 현 총리인 메르켈은 경제개혁조치의 반발로 지지율이 급락한 슈뢰더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당내 일부 세력의 주장을 뿌리치고 슈뢰더의 경제개혁조치를 지지한 사실이다. 비록 집권여당이긴 하지만 국가적인 견지에서 볼때 슈리더의 정책이 나라를 위해 옳은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슈뢰더와 함께 메르켈은 오늘의 독일을 있게한 ‘지도자들’ 인 것이다. 여,야로 갈려 있었지만 조국독일을 살리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던것이다. 슈뢰더는 수술과 회복에 많아도 3년정도 걸릴줄 알았지만 독일경제의 병세는 아주 깊었고 회복에는 두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슈뢰더는 재집권에 실패했고, 메르켈이 정권을 인수하게된다. 당시의 상황을 기준할 때 슈뢰더의 결단은 ‘국가리더십’ 에 해당하는 용기였다. ‘둑에 올라선 사람만이 수위(水位)를 알수있다.’ 집권후 국고가 텅 빈것을 보고 박정희가 한 말이다.
리더십-지도력은, 앞장서고, 방향을 제시하고, 모두가 가지고있는 여러 가지 역량들을 한데 끌어모으는 기술이다. 중심을 잡을줄 알고,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오늘을 파악하고, 내일을 예측하는 기능이며 모두가 따라갈수 밖에없는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용기’ 그 자체다. 그리스엔 그게 없었다. 표퓰리즘의 무서운 악령이 정치지도자의 눈을 멀게하고 머리를 못쓰게 만들어 돈을 꿔서라도 ‘복지’ 라는 못고치는 병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국고가 파산하는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스에는 슈뢰더도 메르켈도 없었다. 대신, 늙은 사회주의자 ‘안드레아도스’ 만 있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통제경제에는 ‘내것’과 ‘네것’ 은 없고 ‘우리것’ 만 있다. 따라서 가난의 평등만 있을뿐이다. 생산성이 극히 저조하기 때문이며 오늘의 북한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래서 꿔다쓰면서 망한게 그리스다.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위험한것도 복지라는 포퓰리즘에 수입보다 많은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빚을 빚이라고 말 하는게 용기이며 그것을 막기위해 결단을 내리는게 참된 리더십이다. 자기의 지지율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2년이면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63년째다. 무역고 1조달러를 이룩한 부자나라가 되었지만 지금 대한민국엔 ‘국가리더십’ 이 없다. 온갖 갈등과 분열, 혼란과 대치국면들로 사분오열된 생각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63년의 일천한 역사에서, 공과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를 따를만한 리더십이 없다. 어느날 여당원내대표라는 위인이 느닷없이 ‘반값등록금’ 을 내 질렀을때,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복지메뉴들’ 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모두가 ‘표’ 때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것인가. 모두가 제 주머니가 아닌 나랏돈을 쓰겠다는 것이며 결국은 그것이 국민의 혈세로 이어지는것은 불을보듯 분명한 일이다. ‘표’ 만 보이는 이기심 앞에 국가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다. 제 이익만 챙기는 정치모리배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의 진정한 위기는 ‘국가리더십’ 의 부재다. 이 숙제를 풀수있는건 ‘똑똑한 유권자’ 뿐이다. 그게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그렇게 할수있는 건전한 ‘민주시민’ 이 절대부족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루아침에 개선될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모두에게 깊은 성찰이 필요한것이 바로 지금이기도 하다. 2012년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선거의 해 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의 모습이 곧 내일의 모습이다.- 최재복 교수. 한해를 마무리할 때, ‘다사다난했던 한 해’ 라고한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는 뜻이다. 2011년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 였음은 두 말할것도 없겠다. 한편, 결산-決算은 돈의 수입과 지출을 마감하는 일 이기도 하고 일정기간 동안의 일들을 모아 정리하고 마무리 한다는 의미도 있다. 지난 한 해를 마무리 해 보는것은 우리들이 걸어온 족적을 살펴보는것이며 그 일을 통해 내일을 예측해 보기위해서다. 모든 경우에, 뒤를 돌아 본다는것은 성찰-省察의 의미가 있다. 내가, 우리가 한 일들을 마음속으로 되돌아보고 살피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성찰’ 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는 힘이 약해져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갈등이 더 커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갈리는것도 결국은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속도가 깊이를 잠식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를 뒤 돌아보는, 생각하는 기능이 크게 줄어든것도 사실이다. ‘읽기’ 가 부족하면 그렇게 된다.
정치,
전철에서 나이 지긋한 중년남자 둘이 나누는 대화가 이러했다. -거 참 이상하단 말이야 멀쩡하던 사람도 그놈의 구석에만 들어가면 영 딴사람이 된단말이야. 아주 못쓰게 되는거야. -그놈의구석이 어딘데. -아, 그거야 여의도 정치판이지 어디긴 어디야. -아니, 거기가 본래 똥통인데 거기 빠지만 다 똥되는거지 별수가 있어?. -허긴 그래. 지난 1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는 재단법인 ‘행복세상’ 의 의뢰를 받고, 성인남녀 1천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일이있다. ‘우리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사람은 누군가’ 라는 질문에 67.5%가 ‘정치인’ 이라고 대답했다. 정치가 국민에게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79.2%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정치’ 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토를 기반으로 조직된 국가의 국민-시민이 그 정치적통치로 개인과 재산이 보호받고, 편하게살기 위한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업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불행하게 하는 원흉이라는 얘기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불행은, 정치인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심을 애국심으로 둔갑시켜려 했던게 그들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듯 하지만 제 솜털하나 건디리지 못하게 했던 그 사심과 욕심에 따라 움직인게 한나라당 의원들이다. 비겁하고, 용기가 없고, 게을렀다. 종북좌파들이 큰소리치고 이글거리는 촛불을 들이댔을때 어느 누구도 맞서 싸우지 못했다. 선거에서 떨어지기를 각오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에는 없다. 계파수장의 눈치 살피기에 연연한 의원들밖에 없었다.‘ 이 글은 한나라당 현역의원인 전여옥이 쓴 것이다. 그집 식구보다 집안사정을 더 잘 알 사람은 없을것이다. 국회에서 7선 의원이면 정치판의 ‘이무기’다. 그 이무기 조순형이 말하는 국회의원의 정형화된 이미지는 이렇다. ‘술 잘 마시고, 자기자랑 잘 하고, 청탁 잘하고, 권모술수에 능한것‘ 이 그것이다. 그는 정치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으로 ‘용기’ 를 꼽았다. 현역의원 두 사람의 얘기속에는 오늘의 한탄스러운 정치판의 속내가 다 드러나있다. 그래서 ‘똥통’ 인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지칠만큼 그 악취에 시달리고 있다. 야권에 대한 언급은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수준이기에 생략한다.
경제.
지난주말, 유럽연합-EU 26개국은, ‘신 안전성장 협약’ 에 합의했다. 재정통합으로 한발 내 디딘 그 협약의 내용은, ‘재정적자기준 GDP3%를 어긴 국가에 자동적인 제재를 가하기로 한것’ 이다. 이는 회원국들의 긴축을 더 강하게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도 이미 ‘재정긴축모드’ 로 들어가 있다. 전세계 GDP 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시장 EU, 미국, 일본의 ‘긴축정책’은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수 없다. 대한민국은 ‘내수시장’ 만 으로는 먹고살수가 없는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있다. 미국과의 FTA 체결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래서 무지하다고 말할수 있다. 해외의 큰 시장이 재정긴축으로 구매력이 떨어지면 우리의 수출이 받는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가 된다. 2012년이 두려운게 그 때문이다. 지금은 한 국가라도 더 우리와 FTA 를 체결할수 있도록 전력투구해야 되는시기다. 무역고 1조달러의 의미는, 대한민국이 개방경제로서 도전과 성장으로 승리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경쟁력이 있는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통계상으론 600만명으로 전체임금 근로자의 34.2%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내 하도급과 자영업체 종사자 231만명을 포함시킬 경우 전체임금근로자 1.751만명의 47.5%에 달한다. 비정규직의 평균급여는 월 134만 8000원으로 정규직 월평균 238만 8000원의 56%수준이다. 국민연금가입 38%, 건강보험에 42%, 고용보험에 41%로 정규직의 절반에 못 미친다. 비정규직은 선진국에도 있다. 그러나 우리와 그들이 다른것은 ‘대우’ 에서다. 그들은 ‘시간제근로’ 를 통해 급여에서는 차등을 두지않는다. 같은 노동조건에서 정규직에 비해 절반수준의 임금을 받고있는 비정규직은 기존의 강성노조-귀족노조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업주의 ‘해고’ 를 어렵게 만든 단체협약은 자신들의 지분과 권익만 지켜, 기업주로 하여금 비정규직을 선호하게 만들었으며, 이 문제는 아무리 정부가 개입해도 해결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산하 현대자동차의 경우 그 큰 회사가 올해 상반기에 뽑은 신규직원이 345명이다. 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뽑지도못하는 것이다. 강성 현대노조의 철밥통이 어떤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숫자다. 정몽구가 거듭 양보해가며 키운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청년실업 300만과 600만의 비정규직은 우리경제가 안고있는 타들어가고 있는 뇌관이며, 내년 경제성장율 3.5%와 맞물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다. 아마도 2012년은 지금보다 더 어려워 질것같다. 사치 와 낭비에서 절약과 검소로 돌아서지 않으면 생활은 더 팍팍해질 것이다. 저성장, 감속의시대를 사는 지혜가 절실한 때 이기도 하다.
사회.
2009년 3월 3일. 국내 최대규모 쇼핑센터인 부산신세계 센텀시티, 개점일에 문을열자 수백명의 여자들이 6층에 있는 란제리코너에 몰려 ‘붉은속옷’ 을 먼저사기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렸다. 급기야 백화점측은 안전요원을 투입, 인간 바리케이트를 만들어야 했다. 이날 하루팔린 붉은속옷은 7억원어치. 신세계백화점은 오픈에 대비해 6개월전부터 약20억원어치의 붉은속옷을 준비했고, 매출이 증가해 추가공급했다고 했다. 붉은속옷이 이처럼 선풍적으로 팔린것은, 영남지방 특유의 속설때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백화점과 속옷가게가 개업하는날 붉은속옷을 사면 재운(財運) 과 행운(幸運)이 동시에 깃든다’ 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어떤 장사꾼이 만들어 퍼뜨린 얘기일 것이다. 지금, 그때 죽기아니면 살기로 붉은속옷을 산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부자가 되었을까. 그럴수 없다는것은 애들도 다 안다. 근자 우리 한국사회의 ‘쏠림현상’ 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이 설 자리가 없을만큼 감정적이다. 쏠림현상은 ‘자기생각’ 이 없기 때문에 ‘남의생각’ 을 쫓아가는 현상이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살기 때문이다. 광우병촛불과 안철수바람도 사실은 같은병세다. 2008년부터 노드아일랜드 스쿨 오브디자인(RISD) 총장을 맡고있는 존 마에다는 이렇게 말한다. ‘SNS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로는 실제로 살아숨쉬는 이들을 설득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다많은 전자메시지를 원하는게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접촉을 원하고 있다.‘ 트위터의 쏠림안에는 ‘진정한 접촉’ 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쏠림에 쓸려내려가면 파국을 만나는게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사회는 그 파국을 향해 요란하게 흘러가고 있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문화.
문화-文化 란 무엇인가. 인간의 공동사회가 이룩해서 그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가치있는삶의 양식과 표현의 체계라고 정의할수있다. 더 풀어 얘기하면, 우리사회가 함께 쓰고있는 언어와 문자, 여러 가지 장르로 갈려있는 예술의 다양한 영역들, 서로다른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있는 종교들, 학문을 통해 학습되는 지식의 세계, 인륜(人倫)에 기초하는 도덕심, 오랜세월을 통해 누적된 풍습들, 효율적인 사회운용을 위한 여러 제도들, 이렇게 다양하게 갈라지는 내용들의 핵심적인 자리에는 ‘가치있는 삶’ 이 있다. 가슴아픈 현실은, 지금 우리사회는 ‘시청율’ 이 문화의 중심에 있다. 시청율은 광고와 직결돼 있으며 그 뒤에는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돈밖에 모르는 무서운 상업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영상’ 이 주도하는 시대에 ‘읽기’ 가 죽어가고 있으며 사물을 ‘일별’ 하는 중독성 습관은 인간성의 황폐로 이어지게 된다. SNS 를 통한, 얄팍하고 사악한 괴담의 산실이 바로 그런중독증 환자들이다. 가치가 상실되고 있는것이다. 상업주의-기업에 도덕성과 양심을 요구하는것은 전적으로 무지의 소치다. 우리시대의 가장 큰 문화적숙제는 ‘막장’ 으로 달리고있는 ‘영상’ 을 극복하는 일이다. 문화의 위기를 체감하지 못하면 할수없는 일이기도 하다. 상업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가치있는 삶’ 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정은 ‘광고에 저항하라’ 고 말씀했다.
교육.
지난 11월 8일, 대구의 한 중학교에서는 51세의 교감이 자기학교 학생에게 맞아 병원에서 치료받는 일이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그 학생이 가지고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압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그 학생은 욕설과 함께 교감의 얼굴과 머리를 때렸고 발로 배를 걷어차기까지 했다. 교감을 향해 복도난간의 화분을 던지기도했다. 그리고 12월 4일, 전남목포경찰서는 술주정이 심한 할아버지를 폭행, 사망케한 혐의로 17세의 손자를 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주사가 심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욕을하며 싸우는것을 말리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차서 할아버지를 죽인것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인간의 기본이 무너진점’ 이다. 그 상징성은 지금 우리의 ‘교육’ 이 사람을 사람으로 기르는 일에 실패했음을 보여주고있다. 대학진학율과 사교육비 지출에서 세계1위의 나라가 맞이한 현실적 비극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은 ‘인륜-人倫’ 이다. 인륜은 ‘인간관계의 기본적 질서’ 다. 이게 무너지면 짐승과 하나도 다를게 없는 사회가 된다. 우리들은 무엇을 위한 교육열에 매달리고 있는가. 학생에게 매 맞고, 손자에게 맞아죽는 할아버지가 정말 남의 일이기만 할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이 성찰해야할 심각한 문제다. 우리의 앞날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종교.
‘삼중 큰스님의 복받는 강연회’ 라는 5단짜리 광고가 자주 신문에 실린다. 자식의 장래, 사업, 금전, 부동산등 무언가 간절히 원하고 답답해 하는 분들게 뜻깊은 인연의 강연회. 강연회에 오시는 모든분들게 전국 명산에서 수행정진한 스님들께서 영험한 법력으로 부동산사업, 취업, 혼사, 매매등 다가올 종합운세를 무료로 풀어드립니다.‘ 불교가 아니라 무당, 점쟁이 수준이다. 불교의 타락인가, 아니면 사이비들인가.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는, 지난 15일, 2012년 총선과 대선국면에서 후보자들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참된 일꾼인가를 선별할 기준을 마련하고 후보자들에게 정책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기로 했다‘ 고 했다. 이 위원회는 4대강사업, 제주해군기지건설, 한.미FTA 체결, 원전건설을 반대해온 단체이며 일부 신부는 제주기지건설 반대에 앞장서서 공사장에 드러눕고, 굴삭기에 올라가 매 달렸고, 경찰관을 때리기까지 했다. 이런 종교의 행태는 종교가 정치를 ‘계도’ 하는 정상적인 기능으로 볼수가 없다. 오히려 종교의 폭력화인 것이다.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은 긴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임은 우리모두가 다 알고있다. 종교가 타락하고 부패하면 그 냄새는 더 고약하다. 정말 우리모두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있다. 종교가 마지막 보루였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너지고 있다.
결산.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해야할 중차대한 문제는,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확인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 무역고1조달러, 세계9위의 나라를 이룩했다. 반면 사회주의 이념을 채택한 북한은 사악한 독재자와 식량문제를 스스로 해결못하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승부가 확실하게 끝난 마당에 ‘좌파이념’이 기생, 우리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있는것은 ‘대응과 처벌’ 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이명박 정권이 져야한다. 500만표 차이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정권의 나약한 모습은 그 자체가 지지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가장 적극적인 영상매체를 피해 라디오뒤에 숨어 연설하는 모습이 딱할뿐이다. 12월17일, 사악한 독재자 김정일이 죽었다. 한반도는 다시한번 여러 가지 예측할수없는 변수들앞에 노출됐다. 지금과 같은 혼란과 갈등하는 국가로는 적절히 대응하기가 어렵다. 우리스스로가 힘들여 이룩해낸 ‘가치있는 삶’ 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각오를 해야할 시기가 지금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시민’이 출현할때가 된것이다. 2012년의 어두운 전망 때문에 더 그렇다.
결산을 할 수 있어야 예산도 세울수 있다.-yorowon. 소설 ‘개미’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런말을 했다. ‘나는 부처를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동양전통을 좋아한다. 서양의 유일신교에서는 신격을 가진 존재가 아주 근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가 보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머를 무척 좋아했던 분이다. 그런분을 설교자와 심판자로만 간주 하는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나는 고통을 요구하는 종교,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라고 요구하는 종교를 믿지않는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형상을 볼때마다 조금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예수는 ‘너희가운데 죄 없는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라고 말하는 예수, 심판하지 않는예수, 참된 인간의 면모를 지닌 예수다.‘ 전통적인 카톨릭국가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얘기다. 그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에는, 평소 웃지않는 수사가 이런말을 한다. ‘성경에 보면 주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자기도 웃지않고 근엄한 얼굴로 일관한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 신앙은 이렇게 무섭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 알수있는 기록은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뿐이다. 요한복음은 희랍철학으로 예수를 해석한 책 이기도 하다. 물론 신약성경 27권이 모두 예수에 대한 내용이긴 하지만 인간예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록한 책은 네 개의 복음서들이다. 왜 복음서에는 웃고있는 예수가 없을까. 정말 예수는 웃지않는 분이셨을까. 바리세인들은 예수에 대해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 이라고 했다. 그러한 회식자리, 즐거운 식탁에 어떻게 웃음이 없었겠는가. 그분은 울기도했고, 웃기도 했으며 분노하고 고통스러워 했으며 하나님을 향해 탄식도 하신분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은 예수에게도 있었던 일반적인 정서인것이다.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을뿐이다.
분명한것은, 복음서들은 ‘예수평전’ 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은 처음부터 제한적이고 분명했다. 그 하나는,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오실분-메시야’ 이며, 그분의 탄생과 삶은 모두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진것 이라는 주장이다. 다른하나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다윗왕가를 잇는 존엄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배타적인 내용이 포함되는데 그건 당시의 다른신들-우상들과의 경쟁이었다.(대개는 바알신이 우세했다.)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기독교로 그 정체성을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신성과 다른신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은 충분히 이해할수 있는일이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는 예수의 어록과 전승을 편집, 핵심적인 내용들을 기록했으며,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내용을 텍스트로하여 자기들이 수집한 구전전승을 첨가하는 방법으로 겹치는 부분과 전혀다른 내용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 공통점은 예수의 신격은 크게 강조되었지만 예수의 ‘인간성’ 은 배제된 점이다. 그래서 복음서 안에는 근엄한 하나님의 아들은 있어도 살아숨쉬는 ‘나사렛 청년’ 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이 어렸을때, 크기스마스가 다가오면 모두가 ‘싼타할아버지’ 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선물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그지없이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가 장성한후 결혼해서 자녀를 낳게되면 이번엔 자기가 싼타할아버지가 돼야한다. 한 인간의 성장도 이와 마찬가지이며 물론 신앙생활도 다르지않다. 히브리서 5장13절에 있는 말씀이 그 뜻이다.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옳고 그른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해 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됩니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니던 어린이가 장성한후 교회를 떠나는 일이 그래서 생긴다. 교리로 포장되고, 교조적으로 화석화된 예수로는 그들을 붙잡지 못한다. 말하자면 조직화된 교회가 만든 교리들은 견고한 ‘이끼’ 가 되어 ‘인간예수’ 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접촉’ 이 차단되는 것이다.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치라’ 고 말하는 이 탁월하고 놀라운 인간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것은 그래서 큰 비극이며 손실이 아닐수없다.
나는 모태신앙의 장로교인이다. 선대로부터 장로교 가정이었기에 나도 장로교인이 된 것이다.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고, 중,고등부를 거쳐 대학생부와 청년회에 있었지만 장성했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70평생을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믿고있다. 내가 가졌던 ‘신앙적의문들’ 에 대해 승복할만한 답변을 들었던 일은 별로없다. 대답역시 다시 교리였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근본주의적 해석뿐 이었다. 그렇다면 ‘교리’ 란 무엇인가. 교단, 교파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성경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해석’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각과 의견의 차이인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인간에 의한 성경의 절대적 해석은 존재할수없다. 인간이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봤고, 특히 신앙생활에서 중심이 되는 마가복음과 갈라디아서는 그것이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로 읽는다. 나는 나 나름대로 대표적인 질문들을 만들어봤고 나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해봤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예수’ 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다. 진심으로 ‘나사렛 청년’ 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게 내 생각이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미가서의 예언 때문이다.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대의 땅에서 가장 작은고을이 아니다. 내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미가서5:1) 예수가 유대인의 왕,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던것이다. 그러나 마태13장 53절 이하를 읽어보면, 예수가 고향마을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그가 나사렛 사람임을 반증한다. '저 사람은 그 목수(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 모친은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 누이들도 모두가 우리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이 기록대로라면 예수는 최소한 7남매의 맏이가 된다. 한편, 성령의 잉태로 요셉과의 관계를 차단한 복음서 기자들이 ‘요셉의 긴 족보’ 를 인용, 예수가 다윗왕가의 대를 잇는 인물임을 강조하는것은 큰 모순이 아닐수 없다. 나는 시나이반도에서 차에서 내려 그 열사의 땅을 오래동안 걸어봤다. 나귀하나에 산모와 갓난애기를 태우고 갈수있는 길이 아니었다. 카이로에 있는 ‘예수피난교회’ 역시 불확실한 전승, 전설이 만들어낸 흔적인 것이다. 의도가 나쁜것이 아니라해도 마찬가지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성령잉태’ 와 누가복음 2장의 ‘예수탄생’ 기사는 복음서의 오리지날인 마가에는 없는 기사들이다. 구전전승이 채택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수있다. 신약성경 27권중 그 기록자의 수준을 기준한다면 단연 바울이 으뜸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으며 유대교와 율법에 정통한 바리세인이었다. 복음서에 비해 한세대 이상 먼저 기록된 갈라디아 4장에서 바울은 예수탄생에 대해 아주 일반적이고 간단한 기록만 남기고있다. ‘그러나 때가 찼을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하셨다.‘ 여기서 여자-a woman-gounaikos 는 보통가정의 평범한 주부이며, 한 남편의 아내인것은 물론, 누가 4장에서는 ‘과부’ 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보통명사다. 신비한 잉태, 탄생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개념은 바울의 신앙-교회에는 없었던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수있다. 나사렛 예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통해 전승되면서 ‘인간예수’ 는 사라지고 웃지않는 ‘근엄한 신’ 으로 변했다. 그래서 전통과 조직, 견고한 교리안에 갇히고 말았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읽는 대목이 있으며, 요한복음 8장에는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2000여년전, 팔레스틴에는 약 70만명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종교지도자, 귀족등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이었다. 이러한 형편은 중세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도 문맹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사렛이라고 하는 변방의 시골목수가 문맹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당시의형편을 기준할 때 그게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마드도 문맹이었다. 한편, 예수와 그 주변에는 늘 바리세인들과의 대치장면이 계속이어진다. 그들은 예수를 공격하고, 예수는 그들을 공격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수의 가까운 인척중 상당수가 바리세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이 많은게 아닌가 한다. 예수는 그들을 통해 그들의 위선을 잘 알고 있었을것이다. 세례요한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예수는 유대교에서도 ‘에세네파’ 에 가까웠던것 같으며 전도자가 지팡이 이외에는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가르침을 읽으면 예수당시 크게 활동했던 희랍의 ‘견유학파’ 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된다. 당시가 그레꼬-로망 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가장 역설적인 사실의 하나는, 기독교의 창시자로 불리는 예수가 사실은 ‘교회’ 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점이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예수사후 바울이 만든것이다. 그는 유대교의 한 종파가 될수있었던 예수의 종교를 독립된 기독교로 만든사람이다. 마가 8장 37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예수가 묻자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아) 이십니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말라고 단단히 당부한다. 그런데 병행구인 마태 16장에 보면 이 간단한 대답뒤에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두루지 못할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있을 것이다.‘ 라는 긴 첨가부분이 나온다. 사실 그때 예수는 ‘교회’ 라는 존재를 모를때이며 이 부분이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나중 누군가에 의해 첨가된 것임은 이미 신약학계에서 결론이 난 부분이다. 예수와 무관한 이 허구위에 로마카톨릭이 서 있다는것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수없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은 지금도 ‘성경’ 보다는 ‘전통’ 을 더 우선하고 중요시한다. 기반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의 개혁을 주장한 분이다. 그분은 그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기사가 요한복음 2장에있는 ‘성전정화’ 기사다.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과 장사꾼들을 몰아냈으며 ‘내 아버지의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고 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고도 했다. 이 과격한 행동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사건이 된것은 말할것도 없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똑같이 다른분들의 다른 생각도 있을수 있으며 또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모두는 예수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함께 열린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의 이런 생각들은 내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고백하건데 ‘이끼’ 를 걷어낼수록 인간예수는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왔으며 그의 말씀들은 더 큰 울림이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인류역사상 이렇게 놀라운 말씀을 한분은 그분 하나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신앙고백했으며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외치는것이다. 이번 성탄절에는 더 많은분들이 더 많이 ‘인간예수’ 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사렛 예수’ 는 우리들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
주여, 나는 당신에게만 소송하나이다 - 파스칼. 지식경제부는 지난 12월 5일, 오후 3시 30분의 통관(通關)집계 기준으로 수출 5150억달러, 수입 4850억 달러로 무역이 1조달러를 기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꿈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1948년 건국한지 63년만에,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 을 세워 수출을 추진한지 50년만에 세계9위의 무역대국이 된것이다. 미국,독일,일본,중국,프랑스,영국,네델란드,이탈리아에 이어 이룩한 국가적인 쾌거가 아닐수 없다. 1948년 건국첫해 우리의 수출총액은 1900만 달러였다. 당시 수출품은 소금, 해삼, 우뭇가사리로 만든 한천, 오징어등과 철광석이 전부였다. 다음이 노동집약적인 가발, 신발, 섬유등이 었으며, 이것이 지금은 반도체, 자동차, 선박, 건설등 지식,기술집약적인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세계시장을 휩쓸고있다. 제조업 전체근로자 403만명중 80%인 320만명이 수출관련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정만 놀라운 발전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무역규모가 1조달러나 되는데, 세계 어떤나라도 우리를 ‘선진국’ 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에는 ‘개발도상국’ 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중진국’ 이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나라’ 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발전을 칭찬할 뿐이다. 서울을 기준할 때, 뉴욕이나 런던, 파리나 로마에 비해 전해 뒤지지 않는 모습이다. 어떤면은 오히려 우리가 앞서있다. 겉으로는 거의같은 모습이며 의,식.주 생활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선진국수준이다. 몇 년전 우리부부는 파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한달을 민박했던 일이있다. 프랑스의 속내를 체험하기위한, 의도된 민박이었다. 한지붕 밑에서 함께 먹고자며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중산층에 비해 훨씬 못 살았다. 의.식.주 모두에서 그랬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문화는 우리보다 크게 앞서있었다. 그들은 이미, 명실상부한 선진국 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선진국이 아니며 조만간 선진국이 될것 같지도 않다. 14년째 2만불 문턱에서 멈춰서있다. 겉모습이 무역 1조달러라면 이제는 우리의 속내도 거기에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정말 선진국이 될수있다.
그렇다면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선진-先進 이란말은 한 분야에서 그 기량이 앞서있다는 뜻이며 발전의 단계나 진보의 정도가 앞서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진국은 후진국에 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교육등의 분야가 크게 발전해서 앞서가고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그러나 선진국들을 여행해 보면 이런 사전적의미 이상의 기준이 있다는것을 알게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고 자기를 실현하며 살수있는 나라가’ 가 선진국이다. 한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이 분명하고, 아무리 다양한 이념이 있다해도 그 정체성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 규제는 아주 엄격하다. 개인의 사유재산권(지적재산권 포함)이 법으로 지켜지며 의무교육을 통해 그 나라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운다.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범위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로우며 모두의 약속인 법은 무섭게 지켜진다. 법을 어겼을때의 처벌은 가혹할 정도다. 절대로 어떤경우에도 새치기는 용서하지 않는다.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인간성’이 경제적인 이유로 추락하는것을 막는 안전장치가 잘 구축되어 있으며 빈부와 계층간의 차이가 크지않다. 물리적 으로는 나라전체가 소음없이 조용한게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아주 친절하다.
우리도 언젠가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선진국도 저절로 만들어 지지 않는다는 점이며 경제규모의 크기가 곧 선진국은 아니라는 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쿠웨이트를 선진국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선진국은 그 경제규모와 함께 사람들의 생각-의식구조도 발전해야 비로서 이루어 지는 ‘사회공동체’ 라고 할수있다. 이 개념을 학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하나의 국가가 장기적으로 발전하고 그 역량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요인으로서의 ‘사회기반구조-社會基盤構造-social infrasturcture’ 가 뒷받침 돼야한다. 이때 사회기반구조는 각종정책과 여러 가지 제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할수 있다. 말하자면 나라의 ‘틀’ 을 말하는것이다. 제도는 법치주의-法治主義, 사유재산권, 교육제도등과 함께 사회의 투명성과 개방성, 민주주의등 고유가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회적 신뢰등을 포함한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조세(租稅)로서 경제주체등이 받는 막중한 영향이 그것이다. 사회기반구조의 발전과 건전성 없이는 선진국이 될수없다. 돈과 함께 생각-의식구조가 중요한게 그 때문이다.
먼저 법치부터 살펴보자. 법치의 ‘원산지’ 는 국회다. 지역선거구민-유권자에의해 선출된 대의원이 곧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의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임무가 입법, 즉 민생을 위한 ‘민주적인 기본법’ 을 만드는것이다. 지금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미료(未了)안건은 전부 6700건이나 된다.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국회의 모습이 그러하다. 다른하나는 ‘의원입법’ 보다는 ‘행정부입법’ 이 언제나 더 많다. 공부하는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선거구유권자의 요구에 따라 어떤 정당에 가입하는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당구조’ 의 틀이 족쇄가 되어 입법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법치가 훼손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당론’ 앞에서도 개인적으로 자유스러워야 한다. 다음이 국가 ‘예산안심의’ 다. 12월2일의 시한을 넘긴 예산안심의의 보이콧은 9년째 계속되고있다. 국민의 소중한 혈세가 어떻게, 무슨일에 쓰이는지 심의하는것은 국회의원의 일차적이고 중차대한 책무다. 예산안심의를 팽개치고 거리로 나가 불법시위에 참가하고 있는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어떤 경우에도 국회의원의 정위치는 의사당이다. 그곳에서 토론과 표결로 문제를 해결해야 옳다. 여기에는 여,야의 구분이 있을수없다.
삼권분립의 민주국가에서, 행정부를 강력하게 견제하는 장치가 국회의 ‘국정감사권’ 이다. 각 상임위 위원들의 책상위에는 해당부서에 요구, 제출받은 자료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행정부를 감사할수 있는 전문성이 없다는것은 애들도 다 알고있다. 쌓아놓은 자료-서류의 높이와 무지-무식은 정비례 한다고 보면된다. 대한민국이 법치국가가 못된다는 것은 국가공권력이 시위꾼들에게 공격받는것을 보면 자명해 진다. 일선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의 부패와 무능은 공권력 자체와는 별개의 문제다. 공권력-공무를 집행하는 일선경찰이 시위꾼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건 절대로 법치국가라고할 수가 없다. 법에의해 다스려지는 법치가 불법적인 세력의 힘에의해 저항받는다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발전해도 선진국이 될수는 없다. 법치는 그렇게 선진국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다음이 교육제도,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공교육은 무너지고 사교육-학원이 이를 기형적으로 대체한 상태다.’ 교육이 인간의 인격적함양과 국가사회가 필요로하는 인재를 길러내는것이 아니라 입시라는 ‘도구과목’에 매달려 배울것을 배우지 못하는 ‘미숙한 인간’을 양산하고있다. 우리사회가 경박해진게 그 때문이다. 수업시간표에서 예,체능이 사라진 시스템에서 ‘교양있고 건전한 민주시민’ 은 길러지지 않는다. 저출산도 큰 문제지만 ‘학원’ 에 의존하고있는 교육은 사실 더 심각한 국가적 손실임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함께 한탄해야 할것은 이 크낙한 잘못을 바로잡을 출중한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과 두세대 사이에 무역1조달러를 이룩해 내는 민족이라면 분명 우수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하는 말이있다. ‘이스라엘, 베트남, 그리고 한국은 정복되지않는 민족이다.’ 우남, 백범, 도산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그릇이 절실히 필요한때가 바로 지금이다.
선진국이 되기위한 사회기반구조에서, 국가정체성-이념은 경제발전과 가장 직접적으로 맞물리는 중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지본주의시장경제를 국가 정체성으로 채택, 사회주의를 채택한 북한과의 경쟁에서 완승을 거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그 모습을 공공연히 드러낸 친북좌파들은 정권은 바뀌었지만 이미 사회 각 부문에 깊이침투, 국기를 흔드는 수준에 이른지 오래다. 근자의 한미FTA체결에 대한 반대는 그 전형으로서 거기에는 나라사랑, 이성적판단, 분명한법적 근거, 양심, 이치가 없다. 한미FTA는 그 자체가 반대의 목적이 아니라 현정부를 뒤집기위한 ‘도구’ 인것임은 그들도,우리도 다 알고있다. 자본주의는 오래동안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고대사회인 수메르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사회공동체에는 계층이 있어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위해서는 국가를 갉아먹고있는 ‘불순세력’부터 척결해야된다. 지금같은 솜방망이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대한민국의 부정부패는 그런 수준이다. 투명성의 부족은 ‘선진국’ 진입을 가로막고있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공무원으로부터 민간기업에 이르기까지 그게 어디든, 어떤일이든 부패가 끼어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선진국은 요원하다. 부패를 그 뿌리에서부터 다스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이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야된다. 우리나라가 외환을 개방하고, 수입을 자유화 했을때 곧 나라가 거덜나고 무너진다고 아우성을 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의 FTA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될것은, 지금은 어떤 국가라 해도 내수시장만으론 먹고 살수가 없다. 다자간협상인 ‘도하라운드’가 답보하고 있는한 FTA밖에는 달리 길이없다. 특히 우리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는 더 말할것도 없다. 30이 손해고 70이 이익이라면 주저할게 없다. 개방은 그 경쟁력 때문에 우리를 도약시킨 힘이기도 하다. 개방은 곧 선진국 체질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주국가 이면서도 ‘민주시민’이 태부족인 나라다. 온갖 불법시위, 집회, 데모와 ‘떼법’이 그것이다. 국회부터가 ‘물리력-힘’으로 대치하고 있지않은가. 망치와 톱을거쳐 최루탄까지 터지는 의사당이 그 상징이다. 민주시민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치’ 가 안되고 있다. 민주시민은 권리와 함께 책임을 알고있는 국민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권리’ 만 있고 ‘책임’ 은 없는점이다. 특히 ‘법’을 지켜야하는 책임에 대해 후진국 수준이다. 법치는 사회기반구조의 핵심중 핵심이다. 이게 제대로 되면 다른문제들은 쉽게 풀릴수 있다. 선진국 사람들이 쓴 책, 선진국 사람들이 만든영화를 보면 우리에게 생소한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한 개인이 위해(危害)를 느낄때 가장 먼저 하는 소리가 그것이다. ‘경찰을 부르겠다.’ 여기서 경찰은 곧 법치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나라의 상식이다. 국가의 힘이 제대로 작동되면 경제는 저절로 굴러간다. 그게 선진국이다. 맨손으로 단지 두 세대만에 무역고 1조 달러를 이룩해낸 민족이라면 사실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모두가 우리들 마음먹기에 달린것이다. 많은 차량들이 최고속도로 질주하던 고속도로에, 갑자가 짙은안개가 끼기시작, 시야가 나빠졌으며 앞에서 달리던 차가 엔진동력이 떨어지면서 감속현상이 일어났다. 충분한 차간거리를 지키지않고 앞차를 바싹 따라가던 뒷차들이 연쇄추돌을 일으키면서 고속도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말았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정이 그러하다. 짙은안개는 내일을 예측할수없는 불투명성인데 국내,외적으로 부딪히고있는 경제, 금융문제가 그것이다. 갑자기 떨어진 엔진동력은 ‘성장동력’이 급격히 저하된 지금의 우리경제사정이 그렇다. 지난 10월 27일, 한국은행은 금년3분기 성장률이 3.4%라고 발표했다. 이는 2009년 3분기이후 1년9개월만에 최저수준인 것이다. 2010년 1분기의 8.5%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경제사정이 얼마나 나빠졌는지를 가늠해 볼수있을것이다. 바야흐로 저성장,감속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며 상당기간 회복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않고있다.
서울 강남에서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고있는 김모씨는 월급이 250만원이다. 할머니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대학때의 학자금 대출 상환금과 오피스텔 월세를 내고나면 한달에 50만원 저축하기도 벅차다. 그는 2년동안 애써 모은돈이 1000만원도 안된다며 ‘결혼과 집마련’ 은 꿈도 꿀수없는 형편임을 한탄했다. 받는 월급의 금액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거개의 젊은이들이 처한 형편은 비슷할것이다. 몰리 캐치폴(22세. 여) 은 워싱턴DC에 살고있다. 대학에서 건축사를 전공한 그녀는 정식 일자리를 구하지못해 아파트의 지하방에서 살고있으며 아르바이트로 버는 월 1600달러에서 집세와 학자금대출 상환금을 빼면 외식 한끼도 할수없다. 그녀는 텔레비전도 차도없이 살고있다. 한국, 미국, 그리고 유럽에 번지고있는 금융위기와 악화되는 경제사정은 이제 시간과 공간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 모두가 같은 파도를 타고있는게 현실이다.
이제 수치로 나타난 서민가계의 형편을 살펴보자. 2011년 9월만 현재, 금융회사들의 가계대출 총액은 840조9000억원이다. 우리나라 가구의 평균부채는 5205만원, 1년전보다 12.7%가 증가했으며, 가구당 재산증가는 7.5%에 그쳤다. 이중 가구주가 30세미만인 가구의 평균부채는 1268만원으로 1년전보다 35.4%의 높은 증가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30대가 15.8%, 40대가 15%, 50대가 10.9%, 60대 이상이 6.2%로 젊은층일수록 가계부채의 증가율이 높게 나타나고있다. 이는 전,월세값의 대폭상승과 물가의 상승이 실질소득을 앞서가는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연5.35%에서 5.86%로 높아졌으며 저축은행 금리는 12.7%에서 16.7%로 뛰어올랐다. 따라서 서민가계가 부담해야하는 전체이자는 56조원에 이를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2010년 국민총소득 1173조원의 4.8%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1년 가계금융조사결과 가구 평균소득이 2010년 3773만원에서 2011년 4012만원으로 6.3%가 증가한 반면, 가계부채의 원리금 상환액은 2010년 489만원에서 2011년 600만원으로 22.7%로 급증했다. 기본소득과 부채상환 사이에서 발생하는 16.4%의 ‘적자’ 는 계속 악화될수는 있어도 개선될여지는 거의없는 악마의 숫자인 것이다. 특히 30세 미만가구의 경우 담보대출에서 생활비마련 비중이 2010년 2.4%에서 2011년 16.8%로 대폭 늘었고 30대 가구는 ‘내집마련’ 을 위해 빚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우스 푸어’ 가 생긴 원인이기도 하다. 2011년 3분기중 소득수준 하위20%인 계층의 엥겔지수(소비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는 7년만에 가장높은 22.8%를 기록했다. 수입과 지출에서 엥겔지수가 높으면 여타지출-생활환경은 그만큼 나빠지는 것이다. 생활의 여유가 사라지고 살기가 더 팍팍해 지게된다.
젊은세대의 가구부채가 전년대비 35.4%로 급증하는것이나 생활비로 쓰이는 비중이 전년대비 16.4%로 높게 나타나고 있는것은 젊은가구일수록 ‘수입과 지출’에서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있음을 뜻한다. 즉 수입보다 지출이 큰 적자가계인 것이다. 지금의 2040세대는, 압축성장시대를 살았던 부모밑에서 부족한것 없이 ‘풍요롭게’ 자라난 세대다. 이 세대의 대표적인 부정적 의식구조의 하나가 ‘절약’ 을 모르는 것이다.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낭비는 일상이었고 원하는것은 그게 무엇이든 손에 쥘수있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학교운동장에 버려진 멀쩡한 물건을 되찾으로 오는 아이는 없다. 다시사면 되기 때문이다. 속도에는 관성(慣性) 이 있다. 운동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 그것이며 고속으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설수없는게 그런현상이다. 지금의 2040세대는 ‘속도의 관성’ 을 가진채 감속시대에 진입, 갑자기 속도를 줄일수 없어 온갖 문제와 부딪히고있다. 그래서 생긴 불안과 불만이 모두 남의탓 이라고 외치면서 어쩔줄 모르고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시작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압축성장-고속성장 시대’는 이미 끝났다. 다시 그런 기적적인 시대는 오지 않는다. 지금은 지구촌 모두가 금융위기와 저성장시대에 진입해 있으며 형편이 나아질 조짐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있다. 모두가 상대적으로 FTA체결을 서두르고 있는것도 ‘관세’ 라는 지출-돈을 절약하고 통상(通商)의 폭과 양을 늘려 악화된 경제사정을 개선해 보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도하라운드’ 가 답보상태인 지금 EU와 미국이라는 큰 시장과 손을 잡은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기회다. 남유럽에서 시작, 북유럽으로 번지고 있는 금융위기는 쉽게말해 버는것은 없이 씀씀이만 키우다 생긴 ‘국가적 적자’ 의 위기다. ‘복지’라는 포퓰리즘이 마지막에 만난 재앙이 그것이며 우리에게는 타산지석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세계경제는 더 악화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에 머물것이다. 우리역시 마찬가지다. 전과같은 고속성장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저성장-감속의 시대를 살게된다. 따라서 ‘체질’ 을 여기에 맞추지 못하면 ‘파국’ 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아파트에도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집을 분양받은후 계속 전세를 놓고있는 가구들이 있다. 2년주기로 세입자가 바뀌는데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이삿짐을 보면 왜 빚을지고 살아야 하는지의 대답이 나온다. 한편 그들이 살고있는 ‘일상의 내용’ 을 보면 대답은 더 명확해진다. 집-부동산은 한두푼으로 구입할수 있는 생활용품이 아니다. 정말 ‘내집’을 장만하겠다면 거기에 걸맞는 ‘생활태도’ 가 확고해야 된다. 이제 몇가지 핵심적인 문제부터 살펴보자. ‘내집’ 은 없는데 ‘내차’ 는 모두 가지고 있다. 자동차는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드는 소유물이다. 우선이 감가상각비(減價償却費)다. 토지를 제외한 고정자산에 생기는 가치의 소모를 결산기마다 계산하여 자산가격을 감소해가는 회계상의 절차가 그것이다. 출고한지 일년만 지나도 찻값이 크게 떨어지는게 그것이다. 비단 자동차뿐 아니라 모든 고정자산은 감가상각되고 있으며 그건 아주 큰 돈이다. 자동차세, 비싼기름값, 보험금, 여기에 수리비까지 합치면 차 한 대에 들어가는 돈은 ‘국민연금불입금’ 보다 훨씬크다. 이런 고정비용은 그대로 두고 제집을 마련하겠다고 하는것은 구름을 잡겠다고 하는것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다음이 엄청나게 큰 텔레비전, 그개 얼마나 많은 전기를 소모하는지 알기나 할까. 에어컨과 각종 가전기기들이 소모하는 전기는 곧 지출해야 하는 ‘돈’ 이다. 이제는 애들도 모두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상당수는 값비싼 스마트폰까지 가지고있다. 가구당 통신비가 월 기십만원이 된것은 이미 일상이다. 그게 꼭 필요한 지출일까. 거기에 절약의 여지는 없는것일까. 애 하나가 보통 여러곳의 학원에 다닌다. 그 돈도 엄청나다. 엄마가 알바로 나서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꼭 그렇게 여러곳의 학원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아이의 천부를 위한것인가, 아니면 소모적인 경쟁심 때문인가. 애들이 걸치고 다니는 옷과 신발도 엄청 비싼것들이다. 이런일상을, 별 생각없이 그대로 산다면 ‘내집마련’ 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빚쟁이 신세도 면하기 어렵다. 정직하게 표현하면 ‘내일이 없는것’ 이된다.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세대가 전셋집을 전전하는게 그래서 생긴결과다.
대한민국 이라는 국가가 ‘저성장-감속시대’ 에 들어섰다면 사람도 거기에 맞춰서 살수밖에없다. 달리 무슨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할수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회피하면 안된다. 정면으로 부딪히고 해법을 익혀야 한다. 우선은, 경제에 대한 지식을 쌓고, 경제적으로 살아야 된다. 최고의 경제는 ‘수입과 지출’ 의 균형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수입의 한도안에서 살아야 한다. 빚은 곧 수입을 초과하는 지출이며 이 지출을 줄이지 않는한 ‘부채인생’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예를들어 내집장만이 당면 목표라면 그 목표이외의 지출은 전부없애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다음은 남과 나를 비교하면 안된다. 상대적 박탈감이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무리한 지출을 해서라도 있는사람들과의 균형을 맞추려 하다간 파산할수 있다. 수분(守分), 즉 제 분수를 아는게 그래서 중요하다. 또 하나는 ‘기대수익율’ 을 낮춰 잡아야 한다. 외환위기이전인 1997년의 은행 정기예금금리는 10.6%였다. 그게 지금은 3.5%다. 금리는 금융의 체온이다. 이게 내려갔다는것은 수입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출도 그만큼 줄일수밖에 없다.
마지막이 slow life 의 정착이다. 소비를 자제하는 생활습관이 그것이다. 가장큰 원칙은 ‘수입안에서 지출하는것’ 이며 없으면 안쓰는 굳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정말 집을 장만하겠다면 우선 사다리에 발을 걸치는 작업부터 해야된다. 집값이 싼 지역으로 이사, 아주작고 낡은집 이라도 마련해야 그걸 발판으로 ‘집’을 키워나갈수있다. 경제는 거짓말을 하지않는다. 경제에는 설마나 대충대충은 없다. 모두가 숫자로 나타나는 세계다. 낭비하면 파국을 만나고 피나게 절약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 이제 2040세대는 속도를 줄여 감속시대를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된다. OECD가 예측하는 2012년의 한국경제 성장률은 3.5%다. 아마도 상당기간 저성장,감속의시대는 계속될것이고 결국은 그게 일상이 된다. 아무리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불만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가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 이라는 선거공약이 사실은 가장큰 사기임도 깨달아야 한다. 결국 개개인이 문제를 직시하고 현명해 지는것이 첩경이다. ‘절약’ 은 영원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껍질을 벗지못하는 뱀은 죽게된다.-괴테. 사람은 누구나 오래살고 싶어한다. 이 오래된 염원은 칼로리가 풍부한 식사와 함께 의료체계의 발달로 이제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됐다. 말하자면 정년퇴직을 하고도 20에서 30년을 더 살아야 하는 장수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평균수명이 늘어난것을 반가워 했지만 세상 모든일이 그러하듯 여기에도 빛과 그늘의 양면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정말 오래 산다는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대답은 개인의 ‘환경과 조건’ 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길고긴 고통의 터널이 될수도 있다. 이제는 노후를 준비하는 ‘조건’에서 경제적인것 이외의 문제들이 있음을 간과하면 안된다. 어떤면에선 새롭게 부딪히는 문제들이 ‘돈’ 보다 더 중요할수도 있다. 그게 누구든 나이가 많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짐’ 이 될수도 있는게 현실이다. 부부간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경우 나이많은 여성이 나이많은 남편을 돌봐야하는 기간이 길어져 부부사이에 ‘갈등’ 이 발생할수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여성의 71.9%가 그런 견해를 밝힌것은 이해할수 있지만 같은 항목에 대해 남성의 66.4%가 동의하고 있는것은 이 문제가 상당한 현실성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수있다. 말하자면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 라는 뜻이다. 다른하나는 여성과 남성의 입장이 바뀌는 케이스도 나타날 수 있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경우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9월, 일본의 한 중소도시 주택가에서 아내의 간병에 지친 94세의 남편이 92세의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 20년동안 병중에 있는 아내를 간호하던 72세의 노인이 아내의 간청으로, 아내의 목을 졸랐고 검찰은 이 노인에게 징역4년을 구형했다. 모두가 너무 오래살았고, 너무 오래동안 병마에 시달려서 생긴 참사이며 재앙인 것이다.
어딘가에 한번 달라붙으면 웬만해선 떼낼수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골칫거리라는 뜻이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를것도 없다. 종일 거실에서 잠옷바람으로 빈둥거리는 거실남, 아내에게 걸려오는 온갖 전화에 귀를 세우고, 아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것은 물론, 하루세끼 밥상을 차려줘야 하는 삼식이 까지 행태도 다양하다. 남편과 아내가 하루종일 집에 같이 있어야 하는 사실은 두사람 모두에게 낯선일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방법에 대해 아는게 없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전혀 달라진 새로운 환경에서 서로에게 적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이 악화되는것이다. 불과 16년전인 1995년, 나이많은 부부들의 황혼이혼은 연간 138건이었다. 그러던것이 2010년엔 1734건으로 대폭 늘어났다. 황혼이혼은, 말하자면 부부모두가 그 인생이 실패로 끝났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이많은 부부는 그 나름대로 공부하고 준비해서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부부가 사는법을 얘기하려고 하는것은 앞에 지적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비교적 지혜로운 대처를 했으며 그 때문에 지금의 ‘노부부의 생활’ 이 큰 문제없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참고용’ 은 되지않겠는가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둘이만 사는 노부부라 해도 ‘생활’ 은 곧 경제를 의미한다. 돈이 없으면 반드시 불화가 생기는게 사람사는 세상이다. 평생을 해로했다해도 늙어서 궁핍하면 그 집안이 편할 수가 없다. 돈은 절대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을 인정하고 준비해야된다. 하나의 기준을 설정한다면 노후가 되어도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면 안된다. 돈에서 독립할수 있어야 생활에서도 독립할수 있다. 한편, 노후를 위한돈은 그 돈을 벌고있을때 준비해야 한다. 돈에 쪼들리지 않아야 그 집안이 편할수 있고 부부의 일상도 원만할수 있다.
은퇴한 남편이 종일 거실에서 서성거리는것은 ‘자기의 공간’ 이 없기 때문이다. 출퇴근하던 현역시절은, 직장의 사무실이 전용공간이었기 때문에 집안에는 아내와 애들의 공간은 있어도 남편의 공간은 없었다. 아무리 부부라해도 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을수밖에 없다면 그건 큰 고통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지금살고있는 집에서 ‘공간구획’ 을 새롭게 해야한다. 우리의 경우, 내가 은퇴하고 교외지역으로 이사했을때 제일큰방은 내 ‘서재’ 로 쓰기로 합의했다. 대신 거실은 아내의 ‘아뜰리에’ 로 쓰기로 했고, 작은방 2개중 하나는 아내의 방으로 쓰고 나머지를 침실로 쓰기로 했다. 따라서 식탁이 있는부분과 부엌의 공간만이 ‘공유공간’이 된 셈이다. 나는, 아침식사가 끝난후 내 서재에 들어오면 점심시간까지 거의 나가지 않는다. 화장실도 따로 쓰기 때문에 더 그렇다. 내 서재는 내가 일상을 사는데 필요한것들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책들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쓰고, 대단히 전문적인 음악감상이 가능하고, 악기 연습과 컴퓨터하기 영화감상등, 내가 필요로 하는 조건은 다 갖추었고, 또 그렇게 꾸몄다. 고등교육을 받은사람이 자기서재가 없다면 그건 정신적으로 대단히 가난하게 살고있다는 뜻이다. 나이들어 서재는 필수조건의 하나다. 오후에는 매일 한시간씩 걷기운동을 나갔다 온다.
우리집 ‘삼식이’ 는 내가 아니라 아내다. 나는 은퇴하기전부터 내가 퇴직하면 아내를 부엌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특히 화가인 아내에게는 그런 ‘해방’ 이 절실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원칙은 아주 실용적이다. 밥과 국, 또는 찌개, 그리고 포인트가 되는 반찬 한가지가 그것이다. 쉽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크게 어렵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나는 미국사람들과 오래 일했고, 십여년을 집중적으로 해외여행을 하면서 여러곳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한식의 중심은 반찬이 아니라 ‘밥’ 이라는 점이다. 서양음식과 달리 우리음식은 어떤 한가지만 으로는 ‘식사’ 를 못한다. 반드시 밥과 반찬들을 함께먹게 돼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밥’ 이 맛 있어야 다른 반찬들로 맛있게 먹을수 있다. 지금은 며느리도 밥만은 내게 부탁하는 수준이다. 고시히까리에 맛좋은 서리태를 얹고, 거기에 찹쌀을 살짝 섞어 해 낸 밥은, 반찬없이 먹을수있을 정도로 감칠맛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맛이있는 음식은 단연코 우리의 ‘잘익은김치’다.
이 반찬은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못하는 수준인데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걸리기 때문에 단지 두사람, 아내와 손녀를 위해서만 만든다. 지금 나는 20여가지의 반찬을 만들 수 있고 모두가 ‘손맛’ 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나는 거의 전적으로 ‘한복려’ 씨의 레시피를 사용한다. 그분의 음식은 ‘진짜토종한식들’ 이다. 며칠전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코다리조림’ 을 만들었다. 아내의 표현은 ‘코도들지 못하고 먹는정도’ 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도라지나물도 만들었고 시원한 된장배추국도 끓였다. 장을 봐오는것부터 식사준비, 그리고 설거지까지 전부 나혼자 다 한다. 지금 우리집에서, 아내에게 있어 나이많은 남편은 젖은낙엽이나 짐이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 인 것이다. 요리하는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여성들에게 환영받게 돼 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하는말은 거의 비슷하다. ‘나 배고파.’ 내가 만든 음식에 푹 빠졌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심하면 소 닭보듯 할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식탁에서의 화제를 늘 준비한다. 신문과 책에서 소재를 택해 아내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대화는 곧 소통이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늘 소통해야 된다. 그리고 부부에게는 함께 즐기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학교회’ 에 출석하기 때문에 예배가 끝나면 세브란스병원 본관3층에 있는 식당가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즐비한 메뉴를보고 음식을 선택하는 재미, 배식을 기다릴때의 기대감, 그리고 매주 서로다른 음식을 먹는 즐거움, 모두가 필요한 일상의 조각들이다. 이런 평범한 일에 소홀하면 안된다. 행복은 작은 조각이 되어 일상안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영화관에도 가고, 음악회에도 가야한다. 무대또한 마찬가지다. 사정이 허락하면 해외여행도 해야된다. 여행은 부부를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게 ‘자유로움’ 이다. 무엇에도 구속받지않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자기만의 일상을 살수있는 조건이 그것이다. 정년퇴직한 남편역시 마찬가지다. 파자마를 입은채 종일 거실에서 왔다갔다 할게 아니라 ‘자기의 공간’ 에 자리잡아야 한다. 아내에게 보다많은 자유시간을 줘야 상대적인 대접을 받는다. 최소한도 매끼 아내가 없어도 스스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을수 있어야 짐이 안된다. 그건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먹기에 달린것이고 누구나 실행에 옮길수 있는 일들이다. 꼭하나 부탁하고 싶은것은, 컴퓨터에 익숙하라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 쇼핑과 인터넷뱅킹은 일상적인 시대다. 나는 이메일은 물론, 블로그와 함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계정까지 다 가지고있다. 혼자, 서재에 있어도 윈도우-창을 열면 거기에 전 세계가 있다. 대영박물관에서 미의회 도서관까지 섭렵할수있는 ‘길’ 이 그 안에 있다. 나이많은 부부도 생각을 제대로 하고 준비만 잘 하면 젊은부부들 보다 훨씬 질감있는 생활을 할수있다. 사실은 그게바로 노년의 ‘특혜’ 가 아니겠는가. 짜장면,
궁핍한생활에서 가끔씩이나마 ‘중국집’ 에 가는것은 커다란 호사였다. 친구몇이 어울려 어렵사리 생긴 용돈을 가지고 중국집에 가곤했다. 그때의 중국집은 거의가 중국인이 주인이자 요리사였으며 빈약한 4인용 식탁 서너개가 보통인 좁은공간 이었다. 이상한 공통점은 거개의 중국집 입구가 낡아빠진 유리창 미닫이 문이었으며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밀가루 푸대로 만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서면 ‘장궤’ 는 웃으며 우리들을 맞았다. ‘장궤-掌櫃’ 는 중국사람을 부자라는 뜻으로 속되게 일컽는 말이다. ‘어서와 해.’ 그리고 우리들이 식탁에 자리잡고 앉으면, ‘뭐 먹어 해.’ 하고 묻는다. 우리가 짜장면을 주문하면, 장궤는 허리높이의 밀가루투성이인 탁자앞에서서 밀가루푸대로 덮어놓은 반죽을 적당량 칼로 잘라낸다. 그리고는 그 반죽을 슬슬밀어 길게 만든후 양손으로 두끝을 잡고 늘려가면서 탁자에 때리기 시작한다. 손님인 우리들은 그 장궤의 손에서 반죽이 가는 국수가 되는 전 과정을 보게된다. 그게 수타국수인 것이다.
다음은 무쇠로된 특유의 ‘웍’ 에 춘장을 볶다가 돼지고기와 함께 썰어놓은 야채들을 쏟아붓고 요란하게 볶는다. 그때쯤이면 우리들은 그 고소한 냄새 때문에 입안에 침이 가득고인다. 삶은국수를 사발에 나누어넣고 그 위에 막 볶은 짜장을 얹어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다. 그 짜장면의 맛, 궁핍한 시대가 아니라해도 그건 천하일미다. 연전, 갑자기 집에 손님이 왔고, 점심때가 되자 그 손님은 짜장면을 시켜먹자고 제안했다. 배달된 짜장면을 보는순간, 그건 전혀 짜장면이 아니었다. 기계국수에 콜탈을 쏟아부은것 이었다. 그런데도 그 짜장면에 이미 중독된 젊은손님은 잘 먹었지만 우리부부는 한 젖가락 뜨고는 더 먹을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쏟아부은 조미료가 입안을 마비시키는것 같았다.
중독현상이 그런것이다. 내가 주말마다 장을 보러가는 홈풀러스 안에는 제법 음식을 맛있게하는 중국음식점 ‘만다린’이 있다. 물론 한국인이 운영하는 집이다. 그집 메뉴에는 짜장면과 삼선간짜장면만 있다. 어느날, 나는 이미 상당히 친해진 점장에게 ‘소고기유니짜장면’ 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점장은 난처한 얼굴로, ‘짜장이나 간짜장은 미리 많이 볶아놓고 쓰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지만 소고기유니짜장은 그것만 별도로 볶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상 어렵다.’ 는 것이었다. 그날은 일단 물러났지만, 그후 계속해서 요구했고, 급기야 점장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길어진걸 보면 주방장과의 얘기가 잘 안 풀렸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는 굽히지않고 갈때마다 계속 요구했고, 점장은 다시 주방장과 담판, 나한테만 해 주기로 합의를 봤다. 값은 8천원으로 정했다. 나는 지금 매주말, 만다린에서 내게만 만들어주는 소고기유니짜장면을, 그 깊은맛을 음미해 가면서 즐겁게 먹고있다. 물론 지금도 그집 메뉴에는 ‘소고기유니짜장면’ 은 없다.
얼마전 우리집에는 전남구례에서 택배로 보낸 달걀 한상자가 도착했다. 스티로풀상자이긴 했지만 몇 개는 살짝 깨져있었다. 그 달걀은 내가 어렸을때 헛간의 닭장에서 꺼내오던, 암탉이 막 낳은 달걀과 똑 같았다. 조금작고, 껍질이 단단하고, 그리고 그 고소한 맛도 똑 같았다. 아내가 친구의 소개로 주문한 달걀이었다. 그 닭들은 사료가 아니라 들과 산으로 다니면서 먹이를 찾아먹기 때문에 달걀이 그렇게 맛이 있다고 한다. 글자그대로 자연산 유정란인 것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혼자 먹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내 블로그를 사랑해 주시는 독자들에게 알리고싶었다. ‘산,들 좋은달걀’ 010-6234-4877 김영복.
서울대치동의 ‘서울무역전시장’ 에서는 ‘2012 봄-여름 서울패션위크’ 가 개막됐다. 국내정상급 디자이너 27명이 참가하는 ‘서울 컬랙션’. 5-10년차 디자이너 10명이 참가하는 ‘테이크오프’. 5년미만 신인 디자이너 10명이 참여하는 ‘제네레이션 넥스트’ 로 구성된 국내 최대 패션쇼행사였다. 일간신문 한면을 다 장식한 그 기사에는 10컷의 사진도 함께 실렸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되는 패션쇼나 신문의 사진을 보면 거기에는 예외없이 전통적인 ‘공통점’ 이 있다. 우선 여성모델들이 하나같이 깡 말라있다. 비린내가 날 정도다. 작고하신 앙드레 김이 이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영양실조가 된 모델지망생을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는 일이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말라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지나치게 말라야 한다는것은 그게 비일상적 이라는 뜻이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까지 마르지 않는다. 다음이 그 모델들의 ‘무표정’ 이다. 젊은여자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는것은 ‘죽은얼굴’ 이라는 의미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야 하는가. 도시 알다가 모를 일이다.
그 모델들이 입고 나오는 옷들이다. 정말, 단 한가지도 일상에서 그대로 입을수 있는 옷은 없다. 어떤 여자가 그런옷을 입고 거리에 나설수 있으며 사무실에 갈 수 있겠는가. 일상에 없는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패션쇼를 볼때마다 우리와는 무관한 ‘그들만의 잔치’ 라고 생각한다. 치약의 튜브까지 몇 번씩 눌러보는 무서운 보안검사를 두 번이나 받고나서야 ‘엘 알’ 에 탑승할수 있었다. 취리히를 떠나 텔 아비브로 가는 이스라엘 항공기는 단연 유대인 손님이 많고, 그들은 아주 무례한 탑승객들이다. 앞좌석의 유대인과 중간좌석의 유대인이 일어선채 화통같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나머지도 비슷하게 소란스러운게 기내풍경이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각오는 했지만 역시 불쾌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가려고 기내의 뒤쪽에 가보니 제일뒷좌석 한줄에 완전 비키니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서비스를 끝낸 스튜어디스들 이었다. 기내가 약간 덥긴했지만 그건 정말 뜻밖의 풍경이었다. 놀래는 내 앞에서 그들은 깔깔대며 웃기까지 했다.
텔 아비브(봄의언덕 이라는 뜻)에서 식사를 하기위해 들어선 식당은 크고 깨끗했으며 웨이터는 지중해가 내다 보이는 좌석으로 나를 안내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식당 중앙통로에 아가씨들이 줄지어 나타나는게 아닌가. 이미 음악은 달라져 있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식 패션쇼였다. 그 아가씨들은 젊고,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며 손님들에게 웃음과 키스와 윙크를 보냈다. 깡마른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팔등신미인에 적당히 살이붙은 건강한 모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걸치고 나오는 옷들은 누구나 쉽게 입을수 있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과 색상이었다. 오래동안 나는 스페인여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이 기준이 바뀐게 ‘모스크바대학’ 에서다. 러시아의 젊은 아가씨들은 세계최고의 미인들이다. 정말 아름다웠다. 놀라운것은, 그들도 중년이되면 절구통같은 허리가 되고 우악스럽고 억척같은 ‘여편네’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탱크같은 러시아의 중년여인들을 당해낼것은 아무것도 없다. 레닌도 스탈린도 안된다.
‘경망(輕妄) 스럽다’ 가 그 한가지다. 그 하는 말이나 행동이 방정맞다는 뜻이다. 방정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무게’ 를 느낄수가 없다. 모두가 가볍게, 반사적으로, 말과 행동을 하고있다. 신중하지 못하면 실수는 따라오게 돼 있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통해 나타나는 온갖 경망스러운 말들은 그 도가 지나쳐 무서울 정도다. 도대체 어쩌다가 사회가 이렇게 경망스러워진 것일까. ‘보기’ 만 있고 ‘읽기’ 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것은 찰라적이고 그때뿐이다. 반면 읽기는 생각을 해야하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 준다. 그 다음이 ‘잔망(驏妄)스럽다’ 이다. 경망과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 이 말에는 맹랑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치에 맞지않는 당돌한 언,행이 있다는 뜻이다. 상식과 원칙에서 어긋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게 그 때문이다. 어떻게 중학생이 자기학교 교감을 때릴수 있는가. 우리가 막장에 살고있다는 증거다.
온갖 껍데기는 화려하고 요란한데 그 아래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없다. 표피적인것은 찰라적이고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다. 경망과 잔망, 그리고 표피적인 것들의 공통점은 ‘깊이’ 와 ‘무게’ 가 없는점이다. 그래서 사회가 온통 경박해 지는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온갖갈등과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깊이와 무게의 부족이다. 말도안되는 온갖 괴담들이 먹혀드는게 그래서이다. 지금 우리모두는 ‘속도가 깊이를 잠식하는 위태로운 시기’ 를 살고있다. 그래도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정(正)이 깨지는 반(反)의 시대가 지나가면 합(合)의 세계가 오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거대한 흐름은 그 무엇으로도 막지못한다. 한가지 크게 아쉬운것은, 그리고 비극적인것은, 이럴때 앞장을 서 주는 ‘큰 그릇’ 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후 ‘남은가족’ 인 우리가 겪은 극심한 고통과 가난은 어머니의 표현대로 ‘소설로는 다 못쓰는’ 수준이었다. 가난한 국가는 우리들을 돌볼겨를이 없었고 방치된 유가족들은 지금 거개가 주변부 계층으로 추락했다. 광복후, 친일파의 자식들은 입신양명하고 독립지사의 자녀들이 주변부 계층이 된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으로 우리들은 고등교육까지 받을수 있었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화는 당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아들은 심혈관전문의 이며 그 아들이 결혼해서 손녀를 낳았다. 우리가족은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 부모님이 계신 동작동 국립묘지로 성묘를 간다. 손녀가 돌이 지났을때 나는 그 아이를 안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애가 제 손녑니다. 두분에게는 증손녀가 됩니다.‘ 그리고, 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건 정말 회한의 눈물이었다. 전쟁의 고통을 겪었던 중학생이 할아버지가 되어 흘리는 눈물인 것이다.
전처럼 부모님께 성묘를 갔을때, 나는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손녀의 손을잡고 아버지의 묘비뒤에 새겨진 글들을 읽으면서 증조부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게 역사이기 때문이다. 1950년 7월1일, 증조할어버지는 남침을 시작한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전사 하셨으며, 그 장소가 경기도 광주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그리고 평생 자식들을 키우며 고생하신 증조할머니가 이곳에 합장되어있는 사실도 들려줬다. 내 손녀는 성격이 차분하고 영민한 아이다. 공부도 잘하고, 코넬대학 병원에서의 연수 때문에 도미한 제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가서 1년동안 미국국민학교에 다닌일도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긴 얘기를 다 들은 손녀의 입에서는, 내게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대한민국이 충격받을수 밖에없는 질문이 나왔다. ‘할아버지, 인민군이 뭐야.’
|